촉망 받는 인재여서 팬티는 갖춰 입고 놀았지

일상을 내려놓지 못했던 우중 여행, 신안 증도

등록 2011.07.15 16:20수정 2011.07.1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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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현 부부 여행에 목마르지 않은 부부. 단둘이 떠난 건 신혼여행이 유일.

지현 부부 여행에 목마르지 않은 부부. 단둘이 떠난 건 신혼여행이 유일. ⓒ 배지영


여행에 목마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내 동생 지현 부부가 그렇다. 단둘이 떠난 건 신혼여행이 유일하다. 그런데도 제부는 내비게이션 업그레이드를 꾸준하게 한다. 지현은 1년에 한 번 정도는 미니홈피 '업뎃'을 위해, 여기 아닌 다른 어딘가에 갈 필요를 느낀다. 큰 아이 제굴은 하루 종일 노트북을 끼고 '메이플 스토리' 할 자유를 꿈꾼다. 모국어의 완성 지점에 이른 둘째만이 여름 여행의 속성을 꿰뚫었다. 뽀로로 수영복을 입고, 뽀로로 튜브를 탄단다.


이들의 동상이몽을 엮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밖에서는 "나만 믿고 따라 와"라고 잘난 척을 하지만 집안에서 나는, 좀, 진상이다. 세탁기 빨래도 똑바로 못한다. 꺼내놓고 보면, 귀신 같은 솜씨로 종이 기저귀가 딱 들어가 있다. 정체를 감추고 빨랫감 속에 숨어서 퉁퉁 불어 있다. 옷들 구석구석 엉겨 붙어 있는, 방부제처럼 생긴 알갱이들 앞에서 울기를 여러 번, 그 때마다 달려와서 수습해 주는 사람은 동생 지현이다.

a 소금 박물관 먼먼 옛날, 맘모스는 소금을 찾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이동했다. 사람들은 맘모스를 먹기 위해 그 뒤를 따랐다.

소금 박물관 먼먼 옛날, 맘모스는 소금을 찾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이동했다. 사람들은 맘모스를 먹기 위해 그 뒤를 따랐다. ⓒ 배지영


폭우 속을 달려 신안 증도에 갔다. 몇 년 전에 배 타고 들어갈 적에는 가장 먼저 눈에 띄던 곳이 소금박물관이었다. 먼먼 옛날, 맘모스는 소금을 찾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이동했다. 인류의 근원이라 불리는 일족들도 맘모스를 잡아 먹기 위해 뒤따랐다. 지금 나는 맘모스처럼 쫓기는 신세! 엄마가 너무 너무 예쁘다고, 엄마 눈에 별이 있다고, 나를 들뜨게 만들던 우리 둘째가 달라졌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나를 따라다니며 말한다.

"엄마를 볶아 먹을 거야."
"엄마 말, 안 들을 거야."

숙소에 짐을 풀었다. 거실 앞 발코니에서는 바다가 보이고, 방이 있는 뒤 발코니에서는 솔숲이 보였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우와! 우와!" 감탄했다. 월풀 욕조를 보고는 열광했다. 동생 지현이랑 마주보며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내 손으로 밥벌이를 해서 처음 여행 갔을 때의 기분. 만날 김밥이나 떡볶이만 먹다가 다양한 음식을 시켜 보고, 술을 실컷 먹으면서도, 돈 걱정 안 할 때의 느낌. 이만하면 출세지 싶던 소박한 감격!

a 비눗방울  비눗방울 놀이는 어디에서 해도 재밌긴 하지요.

비눗방울 비눗방울 놀이는 어디에서 해도 재밌긴 하지요. ⓒ 배지영


a 여름 여행의 속성은 물놀이 뽀로로 수영복을 입고 '물속 여행' 중인 우리 둘째

여름 여행의 속성은 물놀이 뽀로로 수영복을 입고 '물속 여행' 중인 우리 둘째 ⓒ 배지영


큰 아이와 둘째 꽃얄리군은 바로 월풀 욕조에서 놀았다. 들어가서 걸어보고, 누워 보고, 나중에는 비눗방울을 좇으며 좋아했다. 저녁에 다 같이 밖에서 바비큐를 하다가 큰 애(우리 중에서 고기를 가장 잘 먹을 수 있는 능력자)는 월풀에서 놀고 싶다고 동생을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 둘이만 있는 게 걱정이라 나도 뒤따랐다. 아이들은 수영복을 입고 놀고 있었다. 내외 해야 할 제부가 있으므로 나도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까약!"

나도 모르게 월풀 속으로 들어가면서 좋아죽겠는 비명이 나왔다. 좁아도 물장구를 쳐 봤다. 아이들은 물 자체가 재밌는 모양인데 나는 시들해졌다. 탐구할 게 없었다. 어릴 때 여름 방학에 주산학원에 다니면서 기본 2시간은 물놀이를 하고 집에 갔다. 물 속에서 보면 색깔이 조금씩 달랐다. 빨강색 내 샌들이 분홍색으로 보이던 게 생각난다. 고동이랑 가재를 잡고, 멋있는 돌을 줍고, 홍수 지고 나면 떠내려 오는 참외나 오이를 건져 먹었다.


물놀이의 필수품은 수영복이 아니라 납작한 돌이었다. 하루에 버스가 두세 번 다니는 산골에서, 단 몇 명의 아이만이 면소재지 학원을 다녔다. 배달되는 학습지를 했다. 그러니까 촉망받는 인재인 셈이었다. 그런 빛나는(?) 존재들이라 홀딱 벗고 놀 수 없어서 팬티 바람으로 놀았다. 준비 운동은 안 해도, 안목을 가지고 돌을 골라야지만 그 위에 올라가 추위를 몰아내고, 옷을 말릴 수 있었다.

a 염전 옆 습지 습지에 다리가 놓여 있다.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다.

염전 옆 습지 습지에 다리가 놓여 있다.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다. ⓒ 배지영


a 소금 저장 창고 수로가 있어서 아이들의 본성을 자극합니다.

소금 저장 창고 수로가 있어서 아이들의 본성을 자극합니다. ⓒ 배지영


이틀째에 비는 더 쏟아 붓고 호우 경보까지 내렸다. 수영장도 바다도 갈 수 없었다. 우리가 묵는 숙소는 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어질러졌다. 제굴은 게임을 하고, 꽃얄리군은 제 형아를 자꾸 들쑤셨다. 10분에 한 번 꼴로 싸움이 나고 우는 소리가 났다. 텔레비전을 틀어주고, 컴퓨터도 원없이 하라고 하면 더 낫겠지만 집에서처럼 나는 그것만은 못 견뎠다. 어느새 아이들과 나는 성질 내며 싸우고 있었다.

숙소 바깥으로, 리조트 바깥으로, 나가면 좀 더 나아지겠지. '솔트 레스토랑'으로 갔다. 떡갈비와 샤브샤브를 주문했다. '파이터'였던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순해졌다. 천천히 걷자 비구름도 잠깐은 물러갔다. 소금 박물관 옆에는 습지 같은 곳에 다리를 놓아 짱둥어나 게, 염생 식물을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재밌고 좋은 것은 같이 보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 우리는 서로 자기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리키며 몰려들었다가 흩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이힐을 포기하지 않는 지현은 나무로 된 다리에 가끔씩 끼었다. 제부는 아내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아이들 몸은 근질근질해 보였다. 실내에 있었더라면 분명히 둘이서 한판 붙겠지만 천만다행으로 비와 바람이 있는 곳! 던질 수 있는 돌멩이가 널려있고, 퐁당퐁당 그것을 받아줄 농수로가 있었다. 나는 넉넉한 마음이 되어 아이들이 물 속에 빠진다면 신속하게 건져 올리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a 지현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이힐만은 신어야 한다.

지현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이힐만은 신어야 한다. ⓒ 배지영


a 형제 형제 우리집 남성동지들은 실내에만 있으면 꼭 싸움이 붙는다. 돌이라도 던지고 노니까 얼굴들이 펴지는군!

형제 형제 우리집 남성동지들은 실내에만 있으면 꼭 싸움이 붙는다. 돌이라도 던지고 노니까 얼굴들이 펴지는군! ⓒ 배지영


리조트로 돌아와서 동생 부부와 나는 치사하게 굴었다. 우리끼리만 번갈아서 마사지를 받고 해수 찜을 했다. 코팅한 것처럼 피부가 부들부들해졌다고 서로를 치켜세웠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제굴은 파우더 룸에 죽치고 앉아 스마트폰으로 만화 영화 <심슨>을 봤다. 꽃얄리군은 발코니에 서서 비눗방울 놀이를 했다. 혼자서도 방울을 많이 날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스스로 만족하는 게 보였다. 그래서 으스대며 자랑하는 것도 안 했다. 

밤이 늦었지만 다시 월풀로 갔다. 아무도 수영복을 입지 않았다. 이것은 욕조일 뿐, 수영장도 아니고, 바다와는 더욱 거리가 멀다. 한 마디로 시시하다. 나는 장신(아직은 큰 애보다 크다)을 이용해서 농구 골대가 되었다. 욕조에 든 아이들은 속옷을 말아서 나한테 던졌다. 아무래도 꽃얄리군은 잘 못하니까 나는 움직이는 골대가 되어 잘 할 때까지 기회를 주었다. 맥 빠진 큰 아이가 말했다.

"비치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밤은 충분히 깊었다. 비도 인정사정 안 봐주며 쏟아진다. 우리 아이들은 제 엄마도 유재석이 추는 <압구정 날라리>를 꼭 같이 출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도 좋아하고, 까불고 노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 장대비가 쏟아지면 비치볼 같은 건 사러 가기 싫은 사람이라는 걸 모른다. 그냥 엄마일 뿐이다, 엄마. 그래서 나는 공 사러 갈 채비를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지현이 말을 했다.

"엉덩이 붙일 시간이 없네. 그러니까 자매는 군살이 없지."

동생이란 그런 거다. 벼(부아)를 돋우는 존재다. 우리는 두 살 차이여도 어릴 때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자라고 나서야 지현은 내 자매이자 패션 조언자이자 도반이 되었다. 내 친구들과도 모두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됐다. 제굴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 동생은 본질적으로 두 살 차이여도, 열 살 차이여도, 자랄 때는 같은 세계에 속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소년의 아량을 베풀고, 꽃얄리군도 세 살답게 형아한테 귀엽게 좀 굴었으면 좋겠다.  

a 제굴 동생은 본질적으로 두 살 차이든, 열 살 차이든, 같은 세계에 속하기는 어렵단다. 그러니 소년의 아량을 베풀어다오~

제굴 동생은 본질적으로 두 살 차이든, 열 살 차이든, 같은 세계에 속하기는 어렵단다. 그러니 소년의 아량을 베풀어다오~ ⓒ 배지영


휴가 사흘째, 지상에 있는 것들을 쓸어버릴 듯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발코니에 모여 있다. 커피를 마시고, 비눗방울을 날리고, 사진을 찍고, <심슨>을 본다. 꽃얄리군이 "반짝 반짝 작은 별 어여쁘게 빛나네 "노래를 부른다. "아이고, 내 강아지"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개운해진 표정으로 제부도 끼어들어 앉는다. 지현은 묻는다.

"여보, 모닝똥 잘 쌌어?"

제부 얼굴은 빨개진다. 삐쳤냐니까 안 삐쳤다고 하는 것이 확실하다. 삐친 거다. 아직도 신비주의를 고집하는 제부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킥킥대는 걸 억누른다. 머쓱해진 제부는 돌아다니며 흘리고 가는 짐이 있는지 꼼꼼하게 점검한다. 집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여행이라서 야심차게 준비해 온 구명조끼가 처량해 보인다. 사치스럽게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읽으려던 책은 절반쯤에 접혀 있다.

지현은 휴가 여행 '드레스 코드'대로 입는다. 뒤늦게 업히는 것에 빠진 둘째 때문에 나는  '후질러져도' 티가 안 나는 까만색으로 위아래를 입는다. 빗줄기는 거세지만 산책을 나선다. 내 등에 업힌 꽃얄리군은 형아가 엉덩이 귀엽다고 만진 것에 분함을 느낀다. 저만큼 떨어져 있지만 어떻게든 눈을 맞추고 싸운다. '아, 내가 너무 성급했어. 겨우 열 살이라니… 적어도 스무 살 터울은 두고 낳아야 했는데…'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한다.

전날 들렀던 레스토랑에서, 전날 먹었던 음식을 그대로 주문한다. 통창 너머로 바깥을 본다. 갯벌 사이로 파고드는 비가 진눈깨비처럼 보인다. 이제 집으로 간다. 이 여행 같은, 지지고 볶는 일상이 있는 곳으로. 호우 경보는 우리를 따라 북상한다. 차들은 시속 40km로 고속도로를 달린다. 오전 내내 말짱했다는 군산에도, 300mm 넘는 비가 악착 같이 내린다.

a 제부와 꽃얄리군 이모부가 좋아진 꽃얄리군. 얼레리야? 똥꼬가 바지를 먹고 있네요...^^

제부와 꽃얄리군 이모부가 좋아진 꽃얄리군. 얼레리야? 똥꼬가 바지를 먹고 있네요...^^ ⓒ 배지영

덧붙이는 글 | 신안 증도는 7월 8일에서 7월 10까지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신안 증도는 7월 8일에서 7월 10까지 다녀왔습니다.
#신안 증도 #우중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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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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