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의 울부짖음 외면할 수 없다"
'두리반의 감동', 명동에서 되살아나다

[현장] 학생 수십명 숙식하며 연대... 세입자 "학생들 없으면 이렇게 못하지"

등록 2011.07.20 13:07수정 2011.07.2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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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옛 중앙시네마 인근 명동3구역에서 재개발 시행 업체 측이 일부 상가의 철거를 위해 포크레인을 동원하자, 세입자대책위원회 소속 상인과 상인들을 돕기 위해 모인 학생들이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이를 저지하고 있다.
19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옛 중앙시네마 인근 명동3구역에서 재개발 시행 업체 측이 일부 상가의 철거를 위해 포크레인을 동원하자, 세입자대책위원회 소속 상인과 상인들을 돕기 위해 모인 학생들이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이를 저지하고 있다.유성호


19일 오전 10여 명의 세입자들이 농성 중인 서울 중구 명동 3구역 재개발 철거 현장.

전날 시행사 측 용역업체 직원들과 격렬한 충돌이 벌어진 후 조성된 팽팽한 긴장감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흰 티에 검정 바지를 입은 용역업체 직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철거작업을 위해 대기중인 주황색 굴착기가 3구역 앞에 다시 서 있었다. 운전사는 시동을 걸어놓은 채 쪽잠을 자고 있었다.

굴착기를 마주본 채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었다. 10여 명의 세입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이다. 그 중 대여섯 명은 자신의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린다.

허리를 숙여 한 남학생의 휴대폰 내용을 살펴봤다. 트위터를 켜 뭔가를 부지런히 쓰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힘을 보태달라고 쓰고 있다"고 말했다.

건너편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입자가 학생들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한 마디씩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 남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일어섰다. 경희대에서 왔다는 이 학생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하다"며 "내게도 언제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함께 연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옆 여학생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동국대 역사교육과에 재학 중이라는 그는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마이크는 계속 옆 사람에게 전해졌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연대하고 싶다"는 걸 강조했다.


 지난 18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옛 중앙시네마 인근 명동3구역에서 재개발 시행 업체 측이 일부 상가의 철거를 강행하려하자, 세입자대책위원회 소속 상인들을 돕기 위해 모인 학생들이 농성장인 '카페 마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18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옛 중앙시네마 인근 명동3구역에서 재개발 시행 업체 측이 일부 상가의 철거를 강행하려하자, 세입자대책위원회 소속 상인들을 돕기 위해 모인 학생들이 농성장인 '카페 마리'를 지키고 있다.유성호

세입자-학생 연대의 중심이 된 '카페 마리'

이미 문을 닫아버린 중앙시네마 극장 쪽으로 가는 인도 위에 '명동해방전선'이란 펼침막이 걸려있었다. 그 아래에 '카페 마리(Mari)'가 있다. 이곳은 지난 6월부터 명동 3구역 세입자 측의 농성장이 되었다. 흰색 간판과 기둥 사이에 나무판자로 된 문이 덩그러니 달려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양 옆엔 '힘내세요', '함께 하겠습니다' 등의 응원 대자보가 적혀있었다.


문을 열고 살짝 안쪽을 들여다보니 20여 명의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문 근처에서 컵라면 봉지를 뜯고 있던 한 남성이 인사를 했다. 안으로 들어가 봤다. 벽에는 생활수칙, 후원물품 목록, 소감 등을 적은 종이가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숙면에 방해되니 새벽 1시 이후엔 음악연주를 자제해달라', '절대 용역에게 먼저 시비걸지 말기', '우리를 위해 김치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하자' 등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벽 아래에선 십여 명 정도가 부족한 잠을 자고 있었다. 가게 맨 끝 부엌 앞 식탁에선 작은 소리로 기타와 북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농성이나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모두 집회에 열성적인 운동권일 거란 추측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명동 3구역에 찾아온 학생들 중에는 언론이나 트위터를 보고 찾아오거나 친구를 따라 온 경우도 있었다.

공익근무 중이라며 익명을 요구한 경희대 03학번 남학생은 언론을 통해 명동 3구역 소식을 접했다. 명동 3구역 농성 현장에 처음 왔다는 그는 "그래도 한번쯤은 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게 됐다"고 말했다.

김레이나씨(22)는 18일 용역업체 직원이 세입자 멱살을 잡고 있는 트위터 사진을 보고 찾아왔다. 그는 "할 수 있는 건 없어도 일단 와서 같이 있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아르바이트 일정을 조정하고 이곳에 찾아왔다. 자신도 트위터로 오늘 명동 3구역 소식을 알릴 예정이라 했다.

트위터를 통해 연대에 합류하게 됐다는 또 다른 여학생도 "세입자들이 고함치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모른 체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힘없고 가난한 학생이라 이분들의 처지가 이해가 간다"며 "학교나 기업처럼 우리같은 사람들이 권력이 있었다면 이분들이 이렇게 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 덧붙였다.

카톨릭대 일문과 2학년 최희성씨는 친구의 권유로 이곳을 찾기 시작한 경우다. 그는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참하는 등 원래 사회적 관심이 많았지만 명동 투쟁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친한 친구가 권유해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결과를 미리 알 수는 없지만 끝까지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상인들이 주장하는 권리금은 당연히 그들의 권리이므로 투쟁을 통해서 법제도화되도록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19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옛 중앙시네마 인근 명동3구역 '카페 마리' 앞에서 세입자대책위원회 소속 상인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19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옛 중앙시네마 인근 명동3구역 '카페 마리' 앞에서 세입자대책위원회 소속 상인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유성호

"홍대 공연보다 반응이 더 좋아요"

무분별한 도시 재개발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돼왔던 홍익대 앞 칼국수집 '두리반'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많다.

'두리반'은 지난 2009년 크리스마스 이브때 강제철거를 당했으나, 거리에 내몰린 세입자가 다시 들어가 농성에 들어가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매일 음악회와 촛불집회를 여는 등 무려 531일을 저항해 끝내 '기존 상권과 유사한 곳에서 영업을 재개할 수 있게 한다'는 합의문을 얻어냈다. 이와 흡사한 명동3구역 투쟁은 말하자면 '두리반 투쟁'의 재판이자 연장전이라 볼 수 있다.

홍대에서 활동하는 인디그룹 '악어들'의 멤버라는 한 남성은 "즐겁다"고 말했다. '두리반' 투쟁을 끝내고 자연스레 이리로 넘어왔다는 그는 "딱딱하고 무거운 농성 장소를 신나고 재밌는 곳으로 만들어 보고자 음악 공연을 하고 있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이 분들을 돕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홍대 클럽보다 이곳 사람들의 반응이 훨씬 좋아서 즐겁단다. 머릿속으로 공연장면을 떠올렸는지 그의 표정이 약간 상기됐다. 두리반에서 연대의 힘을 맛봤다는 그는 "함께 힘을 보태면 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며 "앞으로도 음악 공연을 하며 세입자 분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용산, 두리반에 이어 명동 3구역 문화제를 기획해온 인디음악인 단편선씨는 처음엔 시위나 집회에 참여하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했단다. 그는 그러나 "재밌게 '놀려고' 참여하다보니 의미도 있고 도움도 주게 되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어차피 홍대에서 불러주지도 않으니 여기서 즐겁게 공연을 계속 하려고요. 안 벌고 안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전 유명인이 될 생각은 없어요. 동네에서 소박하게 음악하며 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동네에서 맘 편히 놀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겠죠. 용산, 두리반, 마리도 이런 이유에서 연대하고 있는 거고."

 19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옛 중앙시네마 인근 명동3구역에서 세입자대책위원회 소속 상인들이 실질적인 보상과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상가 세입자들과 학생들이 농성하고 있는 '카페 마리'에 '죽을 수 없다. 개발악법 개정하라'며 붉은 글씨가 적혀 있다.
19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옛 중앙시네마 인근 명동3구역에서 세입자대책위원회 소속 상인들이 실질적인 보상과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상가 세입자들과 학생들이 농성하고 있는 '카페 마리'에 '죽을 수 없다. 개발악법 개정하라'며 붉은 글씨가 적혀 있다. 유성호

"학생들 없으면 우리가 이렇게 못하지..."

세입자들은 젊은이들의 '연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 5월까지 이곳에서 30여년간 가정식 백반집을 운영했다는 박상임씨(여.68)는 "우리를 대신해 무시무시한 용역들과 싸워주는 학생들이 있어 이렇게 투쟁할 수 있는 것"이라며 "학생들이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세입자는 "여기 있는 젊은이들은 생각이 있는 것 같다"며 "그간 가게에서 일하던 젊은이들을 철이 없다고 무시만 했던 게 미안해진다"고 말했다.

명동3구역 세입자 대책위원회 배재훈 위원장은 "매일 같이 연대하러 와주는 젊은이들이 트위터로 우리의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려줘 고맙게 생각한다"며 "젊은이들이 가진 소통과 연대의 힘 덕분에 든든하다"고 말했다. 

두리반 투쟁에서 승리한뒤 여주인 안종녀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두리반은 승리했지만 잘못된 개발 악법이 바뀐 것도 아니고 아직도 곳곳에서 폭력에 노출되고 쫓겨나는 철거민들이 많다"고 안타까워 했다.

안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우려는 멀지 않은 명동에서 그대로 현실화되고 있다. 그러나 세입자들은 두리반에서와 같이 '연대'하는 학생들이 있어 세상이 변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19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옛 중앙시네마 인근 명동3구역에 시행사 측이 설치한 가림막에 세입자대책위원회를 지지하는 글들이 적혀 있다.
19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옛 중앙시네마 인근 명동3구역에 시행사 측이 설치한 가림막에 세입자대책위원회를 지지하는 글들이 적혀 있다.유성호

#명동3구역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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