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마일 원전사고(위)와 박주아씨 사망사고(아래)는 과정적으로 유사하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병원의 산소호흡기 튜브 관리 소홀로 뇌사상태에 5월 11일, 중환자실의 감염 관리 소홀로 박주아씨는 슈퍼박테리아의 일종인 '감염성 반코마이신 내성 장내구균(VRE)'에 감염됐다. 다음 날, 그녀는 1인 무균실로 옮겨졌다. 이틀 뒤 5월 14일엔 박주아씨의 호흡을 책임지던 산소호흡기 튜브가 '우연히' 빠져 있었다. 당시 박주아씨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100% 기계호흡에 의존하고 있었다. 의료진은 튜브가 빠진 것을 발견하고 다시 삽입했지만 '공교롭게도' 이미 5분 이상 시간이 지체된 뒤였다.
결과는 뇌사 상태였다. 의료진은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지만 '하필' 시술 중 박주아씨의 갈비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부러진 갈비뼈는 폐에 박혔고 그녀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결국 이틀 뒤, 박주아씨는 사망했다.
박주아씨의 산소호흡기 튜브가 빠졌던 날, 간호일지에는 '5월 13일 23시 38분 인공기도를 관리'했으며, '5월 14일 0시 40분에 인공기도 호흡기 튜브가 빠진 걸 간호사가 발견'했다고 적혀 있다. 마지막 호흡기 체크 후 튜브가 빠진 걸 발견하기까지 62분 여 동안 시간적 공백이 있었던 셈이다. 14일 0시 40분에 튜브가 빠진 걸 '발견' 했으니 실제로 튜브가 빠진 후 얼마나 시간이 지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는 '사소한' 관리 소홀이다. 그러나 몇 가지 사소함은 결국 한 여인의 죽음을 불러왔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따진다면 스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사고와 박주아씨의 죽음은 확실히 '우연의 합작'이다. 그러나 한두 가지도 아니고 무려 네다섯 가지의 우연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그저 우연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소한 우연들이 퍼즐처럼 꿰맞춰져 비극을 불러오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적 오류'가 존재한다. 안전관리 시스템의 오류다.
'우연의 합작'이 불러온 죽음...과연 '우연'일까스리마일 원전사고 당시 발전소에는 3단계의 안전관리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각 단계에는 사소한 우연으로도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비상 냉각 시스템의 구멍, 수리 중 팻말에 가려진 계기판의 구멍, 압력조절밸브의 구멍. 각각의 구멍이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위험상황으로 뻗어가는 죽음의 사이클이 완성된 것이다.
박주아씨 사망사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십이지장 천공 발견 후 응급수술에 이르기까지 지체된 약 6시간의 구멍이 중환자실 관리 소홀의 구멍으로 이어졌고, 호흡기 튜브라는 구멍과 연결되며 박주아씨를 죽음의 사이클로 몰아넣었다.
이 '죽음의 사이클'은 비단 박주아씨 사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일단 오류를 가진 시스템 속에서는 그 누구라도 목을 졸릴 수 있다. 박주아씨 사례는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다. 다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의 사이클을 경고한 '적신호등'일 뿐이다.
생전 박주아씨가 치료받은 병원은 신촌세브란스, 2007년 국내 최초로 '환자안전관리에 관한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JCI)의 인증'을 받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관리 소홀에 의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은 인증 여부와 상관없이 병원의 실제 시스템이 심각한 오류를 품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병원 측에서는 박주아씨 사망에 관해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이제 박주아씨 사망사고를 '스위스 치즈' 사고라고 하자. 작은 구멍들로 가득한 스위스 치즈 덩어리 속에서, 여러 개의 구멍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치즈는 속이 뻥 뚫린 결함을 갖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스템 속에 산재한 여러 위험요소들이 하나로 집결되는 순간 치명적인 안전공백이 생겨나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박주아씨 사례가 환자관리체계상 작은 구멍 여러 개가 모인 것이라면 다음에 소개할 사례는 비교적 큼직한 구멍이다. 작년에 발생한 정종현(당시 8세)군의 '빈크리스틴' 사망사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