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을 범하다> 책표지
웅진지식하우스
얼마 전 다른 과 선배와 이야기를 하다 이번 학기에 들은 수업 중 '한국고전소설교육론'이 가장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배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고전이 재미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선배가 너무 놀라서 나도 놀랐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날 고전이 처한 현실이다. 하기는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거의 모든 고전소설의 주제가 권선징악이라는데, 이런 뻔한 주제에 흥미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누가 모를까.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이 선인가' 하는 것인데, 고전소설이 권장하는 윤리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어린 딸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권장되어야 할 '선'이라고 주장하는 <심청전>이나 목숨을 걸고서라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춘향전>이나 현실성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고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고전이라고 떠받들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우리의 현실에서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고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서 고전소설 다시 읽기를 시도한 한 권의 책이 있다. <전을 범하다>(이정원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가 그것이다.
토끼전, 부패한 봉건 권력에 맞선 민중의 승리?모두 잘 알겠지만, <토끼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용왕이 갑자기 병이 났는데, 한 도사가 나타나 토끼의 간이 용왕의 병에 특효약이라고 말한다. 이에 자라가 토끼의 간을 얻기 위해 토끼를 꼬드겨 용궁으로 데려오고, 토끼는 꾀를 내어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용왕은 이 말을 믿고 토끼를 다시 자라와 함께 육지로 보내지만, 육지에 도착한 토끼는 도망친다.
이후의 결말은 이본마다 다르다. 자라의 충성을 어여삐 여겨 토끼가 명약이라며 토끼 똥을 주거나 신선이 내려와 선약을 주는 판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판본에서는 용왕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자라가 용왕을 볼 면목이 없다며 자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이본이든 토끼가 꾀를 내어 자신을 죽이려던 용왕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점은 똑같다. 그래서 <토끼전>을 '봉건 권력에 대한 민중의 승리'로 읽는 것이 보편적인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용왕의 병은 당시 봉건 권력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토끼, 즉 민중의 희생이 필요하지만, 민중은 체제를 위해 희생되기를 거부한다.
토끼는 약자의 위치에 있지만 지혜롭게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부패한 봉건 권력을 조롱한다. 그래서 토끼는 권력 앞에 수동적이거나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민중을 상징한다.
토끼는 선한 민중일까하지만 <전을 범하다>는 이 전통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한 후 토끼가 보이는 모습은 긍정적인 민중의 상과는 거리가 멀다.
용왕이 벌이는 잔치에서 흥이 난 토끼는 그만 '간이 촐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자라는 토끼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고 따진다. 이에 앙심을 품은 토끼는 용왕에게 자라탕이 특효약이라 고한다. 용왕은 자라가 목숨을 걸고 육지를 다녀온 공을 인정하여 자라 대신 자라 부인의 목숨을 요구하고, 그렇게 자라와 토끼의 처지는 완전히 뒤바뀐다. 한 번만 봐달라고 간청하는 자라에게 토끼는 제안한다.
토끼 더욱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네 죽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아내를 하룻밤 내 방에 들이면 괜찮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네 집의 멸문지환(滅門之患)이 눈앞에 날 것이니 조심하라."
하니 별주부가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 의견 어떠하오?"
-가람본 <별토가>에서
이처럼 용왕 앞에서 약자였던 토끼가 그 약자의 위치를 벗어나는 순간, 토끼는 자신보다 약자인 자라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 폭력에는 어떠한 정당성도 찾기 어렵다. 이래도 토끼를 선한 민중으로 봐야 할까? 그보다는 약자이기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지만, 그 위치만 벗어나면 남이야 어찌 되든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존재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전을 범하다>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라 역시 우리가 생각하던 충신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자라의 벼슬인 주부는 조선 시대의 종육품에 해당하는데 높은 벼슬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완판본 <퇴별가>에서는 자라가 평생 모두에게 멸시받았다는 설명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자라는 출세를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러 간 것인지도 모른다.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며 토끼의 제안을 거부한 부인에게 권도(權道)를 권해 결국 동침하게 하는 것 역시 자라다. 이쯤 되면 용왕, 토끼, 자라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두고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토끼전>을 '부패한 봉건권력 vs 건강한 민중'의 도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일 수 없다. 이처럼 <전을 범하다>는 우리가 이제까지 몰랐던 고전소설의 이면을 보여준다. 관심을 갖고 다가서는 이들만 볼 수 있는 고전의 진짜 얼굴이다.
<전을 범하다>의 단점, 물론 있다<전을 범하다>에도 물론 단점은 있다. <전을 범하다>의 가장 큰 단점은 고전소설의 수많은 이본 중 일부만을 선택해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우리 고전소설은 지역이나 인쇄방식 등에 따라 수많은 이본이 있는데, <토끼전> 역시 예외가 아니다. <토끼전>의 이본은 150여 종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전을 범하다>가 택한 이본은 가람본 <별토가>다.
문제는 왜 하필 '암자라 동침' 삽화가 든 가람본 <별토가>를 골랐는가 하는 점이다. 김동건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암자라 동침' 삽화가 들어 있는 이본은 가람본 <별토가> 계열의 6종과 중산망월전 계열에 속하는 13종, 둘을 더해 19종이다. 적어도 숫자만을 놓고 봤을 때 '암자라 동침' 삽화가 수록된 이본은 <토끼전>의 주류라고 보기는 어렵고, 이 삽화가 수록되지 않은 이본에는 <전을 범하다>의 해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일부러 자극적인 내용의 이본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전을 범하다>는 학술 서적이 아닌 대중 교양서이기에 수많은 이본을 모두 다룰 수는 없고 하나를 선택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 고전소설의 다양한 얼굴 가운데 일부만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이본을 다 다루기는 어려웠겠지만, 자신이 어떤 이본을 선택했고 왜 그 이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지에 대한 설명을 넣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다음 책에서는 이런 설명을 볼 수 있길 기대한다.
그러나, <전을 범하다>가 반가운 이유
이 같은 단점에도 국어교육 전공자로서 <전을 범하다>의 존재가 반갑다. 오늘날 고전소설은 학교 현장에서 온당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한데, 그 이유는 고전소설 자체의 문제보다는 교육 방법의 문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토끼전>을 '봉건권력에 대한 민중의 승리'라고만 봐서는 곤란하다. 체제 유지를 위해 민중을 희생시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봉건권력도 문제가 많지만, 자라보다 유리한 위치에 선 순간 자라 부인을 탐하는 토끼도 미덥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만약 토끼가 왕이 된다고 해서, 즉 민중이 권력을 잡는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 올까? 지금 토끼의 행동을 봐서는 권력자의 얼굴이 바뀔 뿐, 별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부패한 권력에 동조해 민중을 희생시키려 했던 자라도, 용왕의 총애 받는 신하였다가 용왕이 병에 걸리자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육지로 가기를 거부하는 용궁의 대신들도 답은 될 수 없다.
그래서 <토끼전>은 권력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로 봐야 한다. 기존 체제를 비판했던 사람들도 권력을 잡으면 똑같이 타락하고 부패하는 현실은 권력 자체의 속성에서 오는 것이다. 차르를 몰아내고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변질하는지 우리는 이미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권력자의 얼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타락 자체를 막을 수 있을까?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다.
이런 복잡한 문제의식을 담은 <토끼전>을 '부패한 봉건권력 vs 건강한 민중' 따위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폭력이다. 사람에게 이 정도 폭력을 휘둘렀다면 합의도 못 보고 꼼짝없이 콩밥 좀 먹어야 할 정도의 폭력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고전소설 교육은 한참 잘못됐다. 학교 교육이 고전소설의 복잡한 문제의식을 단순화시키고 권선징악이라는 틀에 가둬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고전소설은 단순하고 진부한 이야기, 현대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로 점차 의미를 잃어간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전을 범하다>를 읽길 바란다. <전을 범하다>는 우리 고전소설 속에 담긴 문제의식이 그렇게 단순하거나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말해준다.
이 서평은 <토끼전>을 중심으로 다뤘지만, 다른 고전소설에 대한 독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황새결송>이 보여주는 '사법 비리'에 대한 통찰, <김현감호>에 담긴 '타자화의 논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감히 권한다. 무더운 여름날, <전을 범하다>와 함께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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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2024.6~현재 진실의 힘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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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전> 자라 부인, 왜 원치 않는 잠자리에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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