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은 천 개의 칼을 지녔다

[서평] 조선시대 역관 면면 다룬 <조선역관열전>

등록 2011.08.02 16:16수정 2011.08.0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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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중죄 금일참회, 투도중죄 금일참회, 사음중죄 금일참회, 망어중죄 금일참회, 기어중죄 금일참회, 양설중죄 금일참회, 악구중죄 금일참회, 탐애중죄 금일참회, 진에중죄 금일참회, 치암중죄 금일참회

불교의 대표적 경(經) 중 하나인 천수경에 나오는 십악참회(十惡懺悔)로 열 가지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깨닫겠다는 내용입니다.


참회하는 열 가지 죄 중 말로 짓는 죄가 무려 4가지나 된다는 것은 일상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말은 누군가의 가슴을 도려내는 비수가 될 수도 있고, 천 냥 빚을 갚아주는 자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은 의사전달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소통을 위한 가교이기도 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세대나 국가 간에 형성되거나 유무형으로 공유하여야 할 많은 것들이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사소통을 위한 원초적 수단으로 보디 랭귀지라는 수단이 있긴 하지만 보디 랭귀지는 말 그대로 원초적이고 제한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역관, 표현의 외나무다리 소통의 징검다리

요즘은 통역사나 통역관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사전달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통역을 해주는 사람을 역관(譯官)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 역관 열전>┃이상각 지음┃펴낸곳 서해문집┃2011.07.20┃값: 15,000원
<조선 역관 열전>┃이상각 지음┃펴낸곳 서해문집┃2011.07.20┃값: 15,000원임윤수
역관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을 전달해 주는 표현의 외나무다리며, 상대방이 하는 모르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꿔서 전달해주는 소통의 징검다리 같은 존재입니다.
이상각 지음, <서해문집> 출판의 <조선역관열전>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존재였던 조선시대 역관들의 면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전기(傳記)를 차례로 벌려서 기록한 책을 뜻하는 '열전'이라는 제목에서 어림할 수 있듯이 조선왕조 초기에 활약하던 역관부터 근현대에서 활동했던 윤치호까지 조선왕조 500년에 걸친 역관들의 활동을 생생하게 담고 있습니다.  


역관이란 직을 이용한 치부와 허세, 권력다툼이나 이권개입처럼 야사에나 나올 만한 내용들도 적지 않지만 부침 많았던 조선사만큼이나 우여곡절 많은 역관들의 변천사를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통역사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이 있다고 한다. 첫째 해당 외국어는 물론 외교 용어의 현안, 관련국의 역사와 문화를 숙지해야 하며, 둘째 자신의 의견을 함부로 섞어 넣으면 안 된다. 셋째 돌발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담대한 마음가짐과 함께 순발력이 뛰어나야 한다. 넷째 외모나 복장, 행동이 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한다. 다섯째 입이 무거워야 한다. 그 때문에 '통역사는 수표처럼 가짜일 때만 세상에 알려진다'란 말도 생겨났다.

통역이나 번역을 할 수 있는 언어 실력도 뛰어나야 하지만 통역사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통역사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은 진솔한 인간미

통역사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이 있음에도 외교 또한 인간사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니 어떤 실력이나 외교력보다 강한 설득력이 되고 효과적인 외교력으로 발휘되는 것 역시 인간관계,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인격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평소 의협심이 남다르던 그는 홍루 안에 있던 한 여인으로부터 슬픈 사연을 듣고 난 뒤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연인을 풀어 주고 부모의 장례비용까지 대 주었다. 그 때문에 빈털터리가 된 그는 귀국한 뒤 관아에 진 빚을 갚지 못해 공금유용죄로 투옥되었다.

임진왜란의 추를 승리로 돌려놓는데 커다란 역할 한 역관 홍순언이 겪은 일화입니다. 인간적이고 의협심 강한 홍순언의 인격은 후일 조선왕조 최대의 외교 현안이었던 종계변무를 깨끗하게 매듭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계변무란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때부터 십수 대의 왕에 걸친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고쳐 달라고 주청했던 일로 그때까지 이루지 못하고 있던 것을 역관이었던 홍순언의 역할로 매듭을 지을 수 있었던 일입니다.

200여 년간 수차례 걸쳐 수정을 요구했음에도 1509년에 편찬된 '대명회전'에마저 '조선국 고려인의 아들 이성계, 지금의 단은 홍무 6년에서 홍무 28년까지 무릇 네 명의 왕을 모시다 시해했다'고 되어 있던 것을 홍순언의 가교적 역할로 '이성계는 전주의 혈통을 물려받았고 선조는 이한李翰이며 신라의 사공司空 벼슬을 했다. 6대손 긍휴兢休가 고려에 왔다'고 제대로 수정된 것입니다.

홍순언이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장례비용까지 대줬던 홍루 안에 있던 슬픈 여인의 남편이 종계변무를 관장하는 예부의 대표 석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홍순언과 석성과의 이런 인연은 임진왜란 시 조명연합군을 형성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여 임진왜란의 추를 승리로 돌리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한 홍순언의 의협심이 어떤 외교력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던 일들을 해결하는 단초가 되니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는 참된 인격이야 말로 외교의 일선에 서야 하는 외교관이나 통역사들이 갖추어야 할 제일의 덕목임을 알게 합니다. 

부침으로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했던 조선의 역사만큼이나 조선왕조 500년에 활약했던 역관들 또한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합니다. 명나라나 한나라를 대상으로 한 역관도 있고, 개화기를 맞아 일본과 구미 사이에서 역할 한 역관들의 활약상이 시간표처럼 가지런하게 펼쳐집니다. 조선시대의 역관들은 단순이 통역만 한 것이 아닙니다. <종두구감>과 같은 책을 가져오기도 하고, 선진기술을 도입하는 역할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역관 열전>에 담긴 역관들의 면면, 가시밭길 일수도 있고, 대를 이을 만큼 가문의 영광이기도 했던 그들의 모습에서 외교관이나 통역사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활동을 아름아름 가늠해 봅니다. 

<조선역관열전>, 통역사의 역할이 궁금한 사람에겐 시원한 해답으로, 미래의 통역사를 꿈꾸는 사람에겐 나갈 길을 미리 살펴보게 하는 반듯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조선 역관 열전>┃이상각 지음┃펴낸곳 서해문집┃2011.07.20┃값: 15,000원


덧붙이는 글 <조선 역관 열전>┃이상각 지음┃펴낸곳 서해문집┃2011.07.20┃값: 15,000원

조선역관열전 - 입은 천 개의 칼을 지녔다

이상각 지음,
서해문집, 2011


#조선역관 #역관 #이상각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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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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