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주의우리가 하룻밤을 보낸 원시야영장의 푸세식 화장실 앞에 붙은 곰 주의 표지판. 로키 산맥과 그 서쪽 지역에서 야영할 때는 곰의 습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김창엽
엉성한 구식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어렵게 찾아간 야영장은 '원시' 그 자체였다. 미국의 야영장은 화장실, 급수, 전기시설 등이 갖춰져 있으면 흔히 '개발형'(developed)이라고 부른다. 그렇지 않고 최소한의 시설만 돼 있으면 '원시형'(primitive)으로 분류한다. 이날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 야영장은 원시형이었다. 이른바 '푸세식' 화장실이 특징인 원시형 야영장을 처음 접하고 '아들 셋'은 질겁을 했다.
"얘들아 이 얼마나 좋으냐. 음~ 맑은 공기, 자연과 함께 하는 이런 곳이 진정한 야영장이다. 미국에서 진짜 선수들은 아예 화장실도 물도 없는 백 컨트리 캠핑도 한다." '원시 야영'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아이들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 화장실 입구에는 곰을 주의하라는 문구와 그림이 붙어 있었다. 두세 시간 전까지 내린 폭우로 인해 야영장 곳곳에 물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샤워도 못하고 자야겠네요." 아침 저녁으로 하루도 샤워를 거르지 않는 윤의가 실망스러운 듯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내 진짜 걱정은 수십 킬로미터 저쪽, 검은 하늘에서 치는 번개였다. 우리가 이용하는 2개의 텐트 가운데 하나는 비가 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비가 온다면 한밤중에 물을 퍼내야 할 수도 있었다. 주변 여건이 좋지 않을 때는, 심리적 안정이 우선이다. 특히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나면 사람들은 으레 심사와 정서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밥부터 먹자.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더냐." 미리 물에 불려놓은 쌀이 없었기 때문에 단시간에 제대로 된 밥을 하기는 어려웠다. 해서 수동 압력 밥을 짓기로 했다. 덴버 지역은 해발고도가 1600m가 넘는 탓에 물이 빨리 끓는다. 해서 물을 좀 넉넉히 붓고 밥이 끓는 동안 냄비 뚜껑을 강제로 한동안 짓누르고 있었다. 예상대로 좀 딱딱하기는 했지만, 먹을만한 정도로 밥이 됐다. '아들 셋'은 600g 1인분 기준으로 7인분 이상이 되는 삼겹살을 문자 그대로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나는 평소 4~5인 분 정도를 먹어야 양이 차는데, "오늘은 고기가 받지 않는다"며 아이들이 남겨 둔 식은 삼겹살 대여섯 점을 집어 먹는 것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곰이며 늑대 같은 산짐승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깊은 산속의 원시 야영장엔 관리인인 듯한 일가족을 빼곤 밤을 나는 사람이라곤 우리 밖에 없었다. 녀석들은 술이 없어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아무런 도리가 없었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수밖에. 그래도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여행 후 처음으로 술이 등장하지 않았던 이날 밤이 나로서는 은근히 고소하고 흡족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새벽 폭우로 원시 야영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새벽 네 시쯤, 후두두둑, 툭툭툭 텐트 지붕을 세차게 때리는 빗줄기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깬 뒤, 텐트로 스며드는 물을 닦아내려 걸레질을 반복하다가 그만 동이 트고 말았다. 여행을 시작한 뒤 지난 4일간 평균 수면 시간이 2시간 가량이었는데, 결국 이 날도 서너 시간 밖에 못 자고 말았다. 과거에도 여행 초기에는 가수면 상태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번도 예외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하는 여행에선 시차가 더 크게 느껴진다. 비행기가 아닌 자동차 여행이고, 서쪽의 로스앤젤레스와 동쪽의 덴버 시차가 1시간에 불과하지만,역시 몸이 시차를 더 먼저 알아본다. 달마가 동쪽으로 떠난 이유를 난 모르지만, 최소한 동쪽으로 여행이 수행에는 도움이 될듯하다. 잠과 싸움은 유랑인 스타일의 여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매번 야영장을 전전해야 하는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체면을 잊게 되고 비록 시한부나마 그 때부터 수행자와 비슷한 마음가짐이 자리하면서 여행이 삶이 된다. 원래 인생 자체가 여행이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다음 카페 (cafe.daum.net/talkus) 에도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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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본 쌍무지개...모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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