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본 쌍무지개...모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들 셋과 초저가 북미대륙 횡단여행 ⑧] 하루 평균 두 시간 자며 버텨

등록 2011.08.10 17:05수정 2011.08.1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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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군사관학교로 유명한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지나칠 무렵, '후두두둑' 굵은 빗방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북쪽으로 1시간 정도만 더 가면 덴버다. 두어 시간 전부터 자다 깨다를 반복했던 '아들 셋'이 완전히 제 정신이 돌아온 듯 하다. 오후 6시, 이 시간에 깨어 났으니 오늘도 이 친구들이 일찍 잠자리에 들기는 힘들 것 같다. 혼자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선일이, 윤의, 병모 다른 건 몰라도 너희들 먹는 것과 자는 것 두 가지는 확실하다. 인정하마." 
"얘들아, 신경 쓰인다. 비가 긋지 않고 계속 내리면 어떡하지. 텐트 칠 틈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내가 걱정을 늘어 놓았지만, 아들들은 그게 대수냐는 듯 반응이 없다. 그저 두리번두리번 수증기가 끼어 흐릿해진 차창을 통해 밖의 풍경을 훑어본다. 여행 나흘째, 기가 좀 빠지고 지쳐 있는듯한 느낌도 든다.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오늘은 내가 삼겹살을 구워주마."
"야호~. 정말이에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셋이서 거의 환호성 수준으로 합창을 한다. 입에 그저 뭣만 물려주는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더구나 그게 고기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산타페를 떠난 지 얼마 안 돼 점심때 닭고기 패스트푸드를 제법 넉넉하게 사줬는데, 저희들 몫을 다 먹고서도 내 것을 나눠주자, "고맙습니다" 딱 한마디를 던져 놓고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게걸스럽게 해치운 녀석들이다.

"이 놈의 돈 구덩이 녀석들… 그 구덩이에 달러를 얼마나 쏟아 부어야 할지 막막하다."

짐짓 의연하게 한 턱 내는 척 했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속으로 분주히 계산을 했다.


"내일 아침은 어떻게든 식비를 좀 줄여야겠구먼. 안 되면 한 끼 건너 뛸 수밖에."

쌍무지개 로키 산맥 근처 목장 위로 떠오른 쌍무지개. 아래 쪽이 진짜 무지개이다. 위쪽 희미한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순서가 반대인 것으로 보아, 아래쪽 무지개가 반사돼 생기지 않았을까.
쌍무지개로키 산맥 근처 목장 위로 떠오른 쌍무지개. 아래 쪽이 진짜 무지개이다. 위쪽 희미한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순서가 반대인 것으로 보아, 아래쪽 무지개가 반사돼 생기지 않았을까. 김창엽

덴버는 로키산맥 동쪽 사면에 자리한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곳이다. 미국 대도시치고 한국 교포들이 살지 않는 곳은 없다. 현지 교포들 말로는 이 곳의 동포 숫자가 5만 명 이상이란다. 어디에 내놔도 규모에서 뒤지지 않는 커다란 한국 슈퍼마켓이 성업 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삼겹살과 먹을 거리 보충을 위해 고속도로에서 가까운 한국 슈퍼마켓을 찾았다.


 "고기들이 왜 이렇게 싸죠."

선일이가 눈을 크게 뜨며 가격표를 재차 확인했다. 한국에서 금겹살이라고 불리는 삼겹살 값이 미국에선 반도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다. 4kg 남짓의 포장된 삼겹살을 집어 들었다. 3kg짜리를 들었다 놨다를 두어 차례 반복하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먹일 때는 한 번에 배터지게 먹어야지. 그래야 다음 끼니를 굶길 수도 있거든."

나름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결정이었다. 

쌀과 라면도 바닥이 나서 보충했다. 먹는 입이 무섭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곁눈질을 해가며 녀석들의 행동거지를 살피는데, 다행히 술병을 집어 들지는 않았다. 가슴을 쓸어 내렸다. 미국의 한국 슈퍼마켓에서 팔리는 한국 술값은 무척 비싼 편이다. 소주 값만 해도 한국의 서너 배 수준이다.

아무튼 아끼고 아껴서 먹이는데도 네 사람 하루 식비만 평균 60~70달러 선이다. 돈을 잡아먹는 것은 먹성 좋게 보이는 녀석들의 입만이 아니다. 차도 기름을 엄청나게 먹고 있다. 한국 차로 치면 딱 액센트 급인데, 하루에 60 달러 이상의 휘발유를 삼키고 있다. 미국 기름 값이 한국 유가의 대략 40% 선이므로, 아마도 한국 유가로 환산한다면 15만 원 안팎쯤일 것이다. 미국에서 연비가 가장 좋은 소형차라는데 이 정도이다.

풀뜯는 엘크 가족 로키산맥 기슭 야영장 근처에서 엘크 가족이 풀을 뜯어먹고 있다. 산이 깊은 만큼 야생동물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풀뜯는 엘크 가족로키산맥 기슭 야영장 근처에서 엘크 가족이 풀을 뜯어먹고 있다. 산이 깊은 만큼 야생동물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김창엽

한국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나오니, 해가 서쪽의 로키 산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박명이 있어 사위는 그리 어둡지 않은 편이었다. 오늘은 다시 캠핑 모드로 돌아간다. 다행히 야영장으로 가는 중간 앞이 안 보이게 쏟아지던 비가 멎고 늦은 오후의 햇살이 물기처럼 반짝였다.

"저것 좀 봐라. 무지개가 선명하다."

'아들 셋'이 차창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려 빼고 무지개를 주시한다. 전방에 내 오십 평생에 처음 보는 쌍무지개가 떠 있었다. 그 것도 완벽한 아치를 그리고 있었다.

"이런 무지개는 처음 봐요."
"무지개가 어쩌면 이렇게 크고 색깔이 완벽하죠."
"게다가 쌍무지개예요."
"저 무지개 끝까지 가면 무지개를 잡을 수 있을까요."

덩치는 웬만한 어른들보다 훨씬 큰 녀석들이 유치원생들처럼 거푸 감탄사를 토해내며, 들떴다. 쌍무지개는 자세히 보니, 원래 무지개가 대기 중에서 반사되면서 생기는 거였다. 그래서 색깔 배열이 대칭이었다. 즉 본래 무지개가 '빨주노초파남보'라면, 그 위로 걸려 있는 복사판 무지개는 색깔이 '보남파초노주빨' 순서였다. 복사판 무지개는 색깔이 조금 덜 선명했지만, 그 역시 무지개임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의 형태와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쌍무지개를 보다니, 우리 복권 사야 하는 것 아니냐"
"하나 사죠."
"그런데 당첨금을 어떻게 나누지."

아들은 네 명이 공평하게 1/4씩 나눠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들 친구 둘은, 아들과 내가 1/3, 그리고 자기들도 각각 1/3씩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이거 돈 얘기 나오니 인간성들이 드러나는구나. 복권 당첨된 사람들 대다수가 결말이 좋지 않다고 하던데, 말자 말어."

도시에서 나서 크고, 아마도 계속해 도시에서 생활할 아이들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쌍무지개를 볼 기회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대신 허황된 '도시의 쌍무지개', 부와 명예를 죽어라 좆겠지.

"얘들아, 아직까지는 차도 그런대로 잘 굴러가고, 쌍무지개를 우리 여행의 길조를 받아 들이자."

무지개를 뒤로 하고 찾은 야영장은 로키 산맥의 품 안에 깊숙이 안겨 있었다. 헌데 이게 또 다시 왠 우연인가. 야영장을 찾다 처음에 잘못 든 산길이 과거 내가 10개월 동안 미국 여행을 할 때 지나쳤던 바로 그 길이다. 당시는 이번과 반대로 로키 산맥 쪽에서 내려오던 중이었다. 갈 때는 몰랐는데, 잘못 든 사실을 알고 내려올 때 보니 바로 그 길이었다. 같은 길이라도 방향이 다르면 이렇듯 딴판으로 보인다. 인생 길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아내며, 남편이며, 자식이며, 부모가 살아 온 길도 가끔은 반대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곰 주의 우리가 하룻밤을 보낸 원시야영장의 푸세식 화장실 앞에 붙은 곰 주의 표지판. 로키 산맥과 그 서쪽 지역에서 야영할 때는 곰의 습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곰 주의우리가 하룻밤을 보낸 원시야영장의 푸세식 화장실 앞에 붙은 곰 주의 표지판. 로키 산맥과 그 서쪽 지역에서 야영할 때는 곰의 습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김창엽

엉성한 구식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어렵게 찾아간 야영장은 '원시' 그 자체였다. 미국의 야영장은 화장실, 급수, 전기시설 등이 갖춰져 있으면 흔히 '개발형'(developed)이라고 부른다. 그렇지 않고 최소한의 시설만 돼 있으면 '원시형'(primitive)으로 분류한다. 이날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 야영장은 원시형이었다. 이른바 '푸세식' 화장실이 특징인 원시형 야영장을 처음 접하고 '아들 셋'은 질겁을 했다.

"얘들아 이 얼마나 좋으냐. 음~ 맑은 공기, 자연과 함께 하는 이런 곳이 진정한 야영장이다. 미국에서 진짜 선수들은 아예 화장실도 물도 없는 백 컨트리 캠핑도 한다."

'원시 야영'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아이들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 화장실 입구에는 곰을 주의하라는 문구와 그림이 붙어 있었다. 두세 시간 전까지 내린 폭우로 인해 야영장 곳곳에 물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샤워도 못하고 자야겠네요."

아침 저녁으로 하루도 샤워를 거르지 않는 윤의가 실망스러운 듯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내 진짜 걱정은 수십 킬로미터 저쪽, 검은 하늘에서 치는 번개였다. 우리가 이용하는 2개의 텐트 가운데 하나는 비가 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비가 온다면 한밤중에 물을 퍼내야 할 수도 있었다. 주변 여건이 좋지 않을 때는, 심리적 안정이 우선이다. 특히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나면 사람들은 으레 심사와 정서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밥부터 먹자.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더냐."

미리 물에 불려놓은 쌀이 없었기 때문에 단시간에 제대로 된 밥을 하기는 어려웠다. 해서 수동 압력 밥을 짓기로 했다. 덴버 지역은 해발고도가 1600m가 넘는 탓에 물이 빨리 끓는다. 해서 물을 좀 넉넉히 붓고 밥이 끓는 동안 냄비 뚜껑을 강제로 한동안 짓누르고 있었다. 예상대로 좀 딱딱하기는 했지만, 먹을만한 정도로 밥이 됐다. '아들 셋'은 600g 1인분 기준으로 7인분 이상이 되는 삼겹살을 문자 그대로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나는 평소 4~5인 분 정도를 먹어야 양이 차는데, "오늘은 고기가 받지 않는다"며 아이들이 남겨 둔 식은 삼겹살 대여섯 점을 집어 먹는 것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곰이며 늑대 같은 산짐승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깊은 산속의 원시 야영장엔 관리인인 듯한 일가족을 빼곤 밤을 나는 사람이라곤 우리 밖에 없었다. 녀석들은 술이 없어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아무런 도리가 없었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수밖에. 그래도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여행 후 처음으로 술이 등장하지 않았던 이날 밤이 나로서는 은근히 고소하고 흡족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새벽 폭우로 원시 야영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새벽 네 시쯤, 후두두둑, 툭툭툭 텐트 지붕을 세차게 때리는 빗줄기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깬 뒤, 텐트로 스며드는 물을 닦아내려 걸레질을 반복하다가 그만 동이 트고 말았다. 여행을 시작한 뒤 지난 4일간 평균 수면 시간이 2시간 가량이었는데, 결국 이 날도 서너 시간 밖에 못 자고 말았다. 과거에도 여행 초기에는 가수면 상태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번도 예외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하는 여행에선 시차가 더 크게 느껴진다. 비행기가 아닌 자동차 여행이고, 서쪽의 로스앤젤레스와 동쪽의 덴버 시차가 1시간에 불과하지만,역시 몸이 시차를 더 먼저 알아본다. 달마가 동쪽으로 떠난 이유를 난 모르지만, 최소한 동쪽으로 여행이 수행에는 도움이 될듯하다. 잠과 싸움은 유랑인 스타일의 여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매번 야영장을 전전해야 하는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체면을 잊게 되고 비록 시한부나마 그 때부터 수행자와 비슷한 마음가짐이 자리하면서 여행이 삶이 된다. 원래 인생 자체가 여행이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다음 카페 (cafe.daum.net/talkus) 에도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 카페 (cafe.daum.net/talkus) 에도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쌍무지개 #달마 #삼겹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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