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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바로 밑에 집 짓고 살았던 우리 가족. 그것도 국유지에 들어 선 소위 무허가 건물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힘을 합쳐 지었다. 물론 아버지가 주도 하시고, 우리가 도왔지만. 우리 가족에게 처음으로 '우리 집'이란 게 생겼다. 셋방을 전전하던 우리 가족으로선 대궐 같은 집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비록 남들이 볼 땐 허름한 집이었지만.
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에 깔려 돌아가신 어머니
1991년 8월 23일, 그날은 부산에 태풍이 심하게 불었다. 야간 노동을 하고 오신 어머니는 낮잠을 주무셨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산사태를 예감하신 듯 뒷산을 오르락내리락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차마 피곤한 어머니를 깨우지 못하셨다. 확신이 서질 않아 피곤한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주무시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날은 금요일이어서 바로 밑에 동생이 구역예배를 갈까 말까 망설이다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최종적으로 점검해서 심상찮으면 어머니를 깨워 대피시키려 했다.
아버지가 집을 나서 뒷산으로 올라가려는 찰나였다. "우르르 쾅쾅" 일은 벌어졌다. 순식간에 산이 우리 집을 덮쳤다. 아버지는 주무시는 어머니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그런다고 주무시는 분이 들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내를 좀 더 주무시게 하려다가 영원히 주무시게 만들어 버렸다.
내가 군대 복무 하던 시절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나의 군 생활을 처절하리만큼 아프게 만들었다. 아직도 세상 어디에 살아계실 것만 같은 그분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내무반에서 교회(당시 교회 군종병으로 복무)로 혼자 가는 길에 뿌린 눈물이 한강을 이루었으리라. 휴가 나오면 남동생들과 아버지를 건사하느라 바빴다.
아버지의 아픔을 그땐 몰랐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거의 매일 술로 사는 아버지와 방황하는 동생들을 건사하느라 말이다. 내가 이 상황에서 제일 힘든 줄 알았다. 아버지에게 정신 좀 차리시라고 구박을 하기도 했다. 자녀들과 함께 어떡하든 힘을 내어 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교과서적인 주문을 해댔다. 아들인 나도 이렇게 열심히 살려 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누구보다 제일 괴롭고 아픈 분은 아버지였다는 것을. 이래서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나 싶다.
당신의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지은 집에 깔려 돌아가게 했다는 자괴감, 그때 좀 더 일찍 깨우지 못했다는 죄책감 등을 나는 미처 몰랐었다. 그 아픔이 얼마나 큰 지를 불효자는 10년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알았다. 내가 제일 힘든 줄로만 착각하고 살았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나니 아버지에게 죄송하고 또 죄송했다. 좀 더 잘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기다려주지 않으셨다.
2005년 8월 12일, 그날은 동생과 내가 안성 일죽에서 '더아모의집'을 건축하고 있었다. 여름이라 저녁 9시까지 일을 했다. 일을 끝냈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시골집 숙소 앞 수돗가에서 손발을 씻었다. 동생이 아버지 방을 보았다. 창호지로 만든 방문이 열려 있었다.
"아버지,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주무세요?"
동생이 아버지의 고개를 바로 해드리려 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동생이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벽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그대로 돌아가셨다. 병명은 '폐쇄성 질환'이었다. 그래 맞다. 담배를 많이 피우셔서 생긴 병이다. 항상 술도 과하게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펑펑 울었다. 당신을 화장할 때는 거의 실신까지 했다. 좀 더 따뜻한 말을 못 해 드린 것, 아버지를 구박한 것 등만 떠올라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자식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주무시는 길에 조용히 돌아가 주셨다. 주위에선 나보고 효자라지만, 다 '빛 좋은 개살구'였다.
두 분 다 강에서 만나 바다로 향해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강에 뿌려 드렸다. 평소 좋아하시는 강에서 낚시나 하시다가 흘러서 바다로 향해 가시라고.
그러고 나니 부산의 한 공동묘지에 묻힌 어머니가 떠올랐다. 우리 형제는 의논 끝에 결심했다. 어머니도 함께 강으로 보내 드리자고.
아내와 제수씨, 자녀와 조카들과 함께 날을 잡았다. 어머니의 묘지를 방문했다. 경기도에 사는 우리로선 실로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공동묘지 사무실에 이야기하고, 어머니의 무덤을 우리 형제가 직접 파헤쳤다.
땅속에 14년 주무시던 어머니를 우리 형제는 깨웠다. 그 어머니를 화장해서 봉지에 담았다. 승합차를 타고 부산에서 안성으로 왔다. 아버지를 뿌려 드렸던 그곳에 어머니도 뿌려 드렸다. 함께 손잡고 바다로 가시라고.
적어도 우리 형제에겐 8월은 '그리움의 달'이다. 우연찮게 두 분 다 8월에 가셨다. 형제들과 제수씨, 조카들과 자녀들 모두가 의논한 끝에 8월 셋째 주 쉬는 날에 합동 추도식을 하자고 결정했다.
올해 8월 13일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셋째 주가 아닌 둘째 주였다. 셋째 주가 아니었지만, 우리 형제들이 다 모일 수 있는 날이었다.
이 세상에 유일한 부모님 사진을 모셔놓고 기념식을 했다. 태풍으로 인해 집이 무너졌으니 사진인들 온전했을까. 다행히도 막내 동생이 몇 장 건져 놓은 사진 중 하나였다. 두 분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추도 기념식을 하고나서 우리는 이런 농담을 했다.
"허허. 두 분이 '견우와 직녀'인 가벼. 음력으로 7월에 두 분이 한 번 만나니 말여. 그것도 자손들과 함께 이리 만나니 얼마나 좋으실까"
우리는 추도 기념식을 통해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 우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며 속삭여 드렸고, "아버지 어머니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고 다짐했다. 손자들도 사뭇 진지했다.
우리 형제와 그 식구들은 내년 8월을 맞이할 이유를 남기고 그렇게 각자 삶터로 돌아갔다.
* 아래는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우리 형제가 행했던 기념식 순서를 실었습니다.
추도 기념식
1. 묵념 - '세월이 가면' 노래들으면서 두 분에 대한 그리움 되새기기.
2. 노래 - 예수 사랑하심은(생전에 좋아하시던 찬송 같이 불러보기)
3. 두 분에게 드리는 말 - 송준영 ('아침이슬' 노래 들으면서, 손자가 두 분에게)
4. 두 분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생전 고인들의 뜻을 다같이 따라하며 되새기기)
- 사람 집에 사람이 와야 한다.
- 이웃에게 인사하고 살아라.
- 나누며 베풀고 살아라.
5. 이름 한자로 말해보기 - 두 분의 이름으로 풀어보는 인생 되새겨 보기.
어머니 - 목숨 명, 착할 선 : 착한 인생으로 살아라.(선한 기운)
아버지 - 봄 춘, 푸를 벽 : 푸른 봄처럼 살아라.(즐기면서)
6. 감사의 말 - 인도자의 말을 다같이 따라하기
송춘벽 김명선 / 당신들이 있어 / 우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7. 묵념 - 사랑으로(해바라기의 노래를 들으며- 당신들의 뜻대로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겠다는 마음으로)
8. 순서에 대한 의논
2011. 8. 14 금광면 장재동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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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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