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1] 경제수준이 비슷한 OECD 11개국 조세부담률과 공공복지지출 비중(자료: OECD, IMF국가1인당 GDP( 미 달러) [2009] 조세 부담률(%))
코리아연구원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은 적어도 복지부문에 있어 공짜점심을 먹을 이유가 충분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결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온통 길바닥에, 강바닥에, 호화청사에, 분양장사용 아파트에 쏟아 붓느라 국민들의 가계에서 주름살을 깊게 파고 있는 교육비, 의료비, 어린이집 보육비, 주택부금 등등에 보탬이 되는 역할을 외면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정치인들, 관료들, 그리고 지식인들 일부는 국민에게 공짜점심은 부도덕하다고 설파한다. 세금을 더 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급기야 경제가, 국가가 망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공짜점심이 아니라 이미 내가 충분히 대가를 낸 것이므로 당당하게 향유할 권리라고. 경제개발기구 국가들의 평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복지지출이 적다고, 아니 비슷한 경제력 규모의 국가들에 비해 아직도 100조원 가까이를 덜 받고 있다고, 그리고 복지 때문에 거덜 난 국가는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이들의 맹목적이고 일면적인 거짓된 신념에 의해 복지 없는 경제성장에만 매진한 결과, 우리사회는 오로지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 세상 풍파에 대해 홀로이 대처해 나가는 정글북 사나이, 패자 부활이 없는 승자독식의 사회가 그 결과다.
그러나 복지와 함께 성장하는 길을 달려온 선진 복지국가들은 정글을 공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누구나가 안심하고 다닐 수 있도록 가시덤불을 없애고 죽음의 늪을 치워 버렸다. 정글의 비극을 맛본 국민들은 '모두'의 공원을 위해 자신의 능력에 비례하여 세금을 냈고 그 결과를 함께 향유하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지금 불고 있는 무상복지, 보편적 복지에 대한 열망은 우리 사회를 정글에서 관리된 공원으로 바꾸자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II. 무상급식 논란의 감상법무상급식 주민투표가 점입가경이 되고 있다. 오세훈 시장이 마침내 시장직까지 거는 통큰(?)판을 만들어 버렸다. 사실 무상급식에 대한 논란은 무상급식 그 자체와 오세훈 시장이 언급한 대로 '복지포퓰리즘'의 확대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각기 논의해 볼 수 있다.
우선 무상급식 자체에 대해 논해보기로 하자. 사실 이 문제는 정책 집행의 우선순위와 기술적인 집행 효과성, 재정 확보 가능성의 판단에 관한 문제다. 아주 단순화시키면 서울의 초중등학생들 모두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사안이며 어느 정도 범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효과적이며, 서울시 교육청과 서울시가 2000억에 이르는 급식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물론 이에 대한 결론의 도출 또한 모두가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작스럽게 등장한 결식아동의 문제와 이미 전국적으로 80만명에 이르렀던 급식지원 학생의 규모, 부분 급식을 둘러싸고 일선 현장에서 벌어지는 반교육적인 부작용의 문제들을 고려하면, 비록 세계에서 핀란드와 스웨덴만 무상급식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나라가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더군다나 오세훈시장이 주민투표에 부의한 방식대로 하위 50% 계층에 대해서만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은 행정적인 비용의 유발 정도가 우심한 면이 있다. 50% 지점을 끊어내려면 거의 대다수 학부형의 소득을 공적으로 추적하여 일렬로 세우는 거대한 작업을 해야 하며, 그 결과로 끊어내는 50% 선에 대해 경계선상에 있는 이들의 동의 여부를 획득하는 작업은 지난한 행정비용을 유발할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소득파악률의 낮은 수준과 상대적 박탈감의 팽배라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제 부모와 아동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평균이하 계층과 평균이상 계층이란 확실한 분류를 행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위화감이나 열패감은 숨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서울시가 부담해야 하는 재정의 정도는 전체 서울시 재정의 0.3%에 해당한다는 측면에서 재정동원이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측면에서 보면 적어도 이 문제 자체는 180억 원이란 물리적 비용과 엄청난 그 이상의 기회비용을 지불하여 주민투표를 할 사안은 결코 아니라는 판단이 든다.
그렇다면, 오세훈시장이 내건 두 번째 이유, 이것이 보편적 복지라는 복지포퓰리즘의 시작이며 이를 저지하고 재정파탄으로부터 구하는 성전(聖戰)이라는 측면은 어떠한가? 이는 이미 앞 장에서 본 것처럼 한국의 복지현실에 대한 무지함을 넘어 한국 국민들의 고통의 현주소를 외면한 사고의 결과라는 점에서 처연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보편적 복지는 결코 국가부도의 원흉이자 포퓰리즘의 대상으로 폄하될 수 없는, 인류가 20세기에 안착시켜 놓은 복지국가라는 국가운영질서의 매우 중요한 기조에 해당한다. 더군다나 보편적 복지가 무조건적인 퍼주기 복지이고 무상복지인 것만도 아니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정의부터 하자. 유명한 닐 길버트(Neil. Gilbert)에 따르면 이는 "경제적 무능력 여부를 따지지 않고 급여를 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것과 대비되는 개념은 물론 선별적 복지이지만 모든 복지제공의 형태가 두 가지 만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중간의 모호한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 복지에 대해 세인들이 갖기 쉬운 첫 번째 오류다. 즉, 보훈처럼 사회적으로 보상해야 하는 경우는?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욕구가 있는지를 진단해야 하는 경우는? 경제적 능력을 조사하되 소득에 따라 차등적으로 급여수준을 결정하는 경우는? 상위 10~20%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다 주는 경우는? 이 모든 것들이 보편적 복지인지 선별적 복지인지를 정확히 가를 수 없는 경우다. 따라서 극단적인 양극단이 있고 나머지는 그 사이 연속선상의 어느 지점에 있을 뿐이며 상대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보편적 복지는 모든 것을 공짜로 누구나에게 주자는 것인가? 이 부분에서 두 번째 오류가 있다. 보편적 복지의 전형이 사회보험인데,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이 그 예이다. 더 나아가 아동수당, 무상의료, 무상급식 등이 그 예인데 보험료나 조세로 이미 상당한 기여를 행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는 결코 '공짜 점심'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상당 정도 평상시의 기여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란 모든 부문을 그렇게 하자는 것인가? 여기에 세 번째 오류가 스며들 수 있다. 어느 선진복지국가도 결코 모든 복지제도를 보편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 시대, 그 사회에서 어떤 기본적인 욕구가 가장 긴요하고 완벽하게 해결될 필요가 있는지를 따져서 사회적 합의를 거쳐 핵심적인 영역을 보편적 복지로 해결할 뿐이다. 2차세계대전 직후 영국은 무상의료를 택했고, 1950년대 스웨덴은 아동수당을, 1980년대 핀란드는 무상교육을 대표적인 보편적 복지정책으로 삼았을 뿐이다.
이런 오류를 제거하고 나면 보편적 복지란 한 나라의 정책 구현상의 '기조'이며 '경향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현재 왜 이런 기조와 경향성이 요구되는가? 지금까지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선별적 복지를 기조로 삼아 달려온 한국사회가 현재 드러난 사회적 난맥상, 즉 사회양극화, 저출산, 고령화, 중산층의 와해, 빈곤여성·빈곤아동·빈곤노인·빈곤장애인의 대규모 존재, 인적자본의 훼손, 성장동력의 쇄잔 등등의 문제가 심화되어왔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이 문제를 경제성장과 선별적 복지로 해결하자는 것은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을 문제의 해결자로 내세우는 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를 망국적 포퓰리즘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더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애초 보편적 복지가 갖고 있는 개념의 다양성과 정책의 경향성으로서의 의미를 부정하고 "부자에게 줄 필요가 없다"는 식의 경박한 개념과 경직된 정책으로 논쟁을 몰아가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을 '보편적 복지 쓰나미'의 전초전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III. 무상급식 논쟁을 넘어 '진정한' 무상보육으로어쨌든 무상급식 논란은 24일 서울시 주민투표에 의해 어느 정도는 가닥을 잡을 일이다. 그렇지만 무상복지 시리즈의 또 다른 국면은 무상보육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다 같은 무상임에도 무상급식과는 달리 커다란 사회적 쟁점사항으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오로지 한나라당 내부에서만 찻잔속의 태풍처럼 이야기될 뿐.
그 이유는 자명하다. 알다시피, 무상으로 보육서비스를 이용케하자는 결단은 무상을 '복지포퓰리즘'으로 스스로 규정한 여권과 보수층으로부터 행해졌다. 이미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부터 만5세아에 대한 무상보육 및 무상유아교육 실시를 선언한바 있다. 사실 그것이 2011년 4월 27일 재보선에서 여권이 타격을 받은 뒤 나온 터라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받았었지만 어차피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 및 진보복지진영에서 주창하던 것이었기에 논란의 대상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5세아에 대한 무상보육은 이미 이명박정부에서 아래 표와 같이 아이사랑플랜에 의해 발표한 내용을 실천에 옮긴다는 점에서 커다란 쟁점 사항이 아닐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