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미국서 사온 파란 구두를 신었습니다

남양마을 할머니의 활기찬 시골동네 마실 이야기

등록 2011.08.26 17:57수정 2011.08.2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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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마을로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를 만났다. 이름이 독특해서 머리에 깊이 박혔다. 예전부터 단골이었다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의 이름은 조점심. 남양마을에 사는 할머니다.


한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이름 속 한자를 분석하는 습관이 생겨서 나도 모르게 속으로 되뇌었다. '조점심, 조점심'. 내 멋대로 분석한 결과는 '이른 점심'.  매번 오전에 진료실을 찾아오는 걸 보면 뜻이 얼추 들어맞는다. 걸걸한 목소리와 수다로 무장한 점심 할머니가 어쩌다 하루 안 오는 날에는 뭔가 빼먹은 기분이 들 정도가 되었다.

같은 시골에 산다 해도 나와 동네 어르신들의 동선이 일치하기는 어렵다. 어르신들이 일 나가는 낮에는 내가 보건지소에 있고, 내가 산책하는 밤에는 어르신들이 집 안에 계시기 때문. 허나 조점심 할머니의 활달한 성격 덕에 나는 그녀를 두 번이나 만날 수 있었다.

집집마다 가정방문을 다니던 금요일, 그녀와 마주쳤다. '돌돌돌돌' 보행기를 끌며 길을 내려가는 할머니. 가시는 곳을 묻자 계모임을 간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씩 동갑내기들의 계모임. 동갑내기 친구를 '갑장'이라고 부르는데, 근처 동강, 죽산, 망주, 중산, 남양 등지에서 8-9명 정도가 모임에 나온다고 했다. 왠지 신기해서 할머니를 붙잡고 이야기를 나눴다.

"계모임 하면 뭐 하세요? 술도 드시나?"
"술은 안 먹어. 사이다 시키제. 낮에 모여. 모여서 점심 먹고 서너시에 가지."

각자 만 원씩 각출해서 밥을 먹는 할머니들 모습이 연상돼서 웃음이 나왔다. 두번째 만남은 생각보다 일찍 왔다. 다음 날 진료를 위해 미리 들어와 있던 일요일 밤. 체력 유지를 위해 달리기를 하던 중이었다. 내 앞에서 멈추는 버스 한 대. 차에서 내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 땅에 발을 딛자마자 다들 손에서 꺼내는 물건. 지팡이다. '딱 딱 따악'. 지팡이를 짚으며 네 명의 할머니들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걸걸한 목소리가 나를 반긴다.


"나 점심이네. 점심. 내일 치료받으러 갈라네."

서로 바빴던 나와 그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 날 약속을 지킨 그녀에게 전 날 다녀온 곳을 물었다. 야바위꾼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 있단다. 오만가지 물건이 다 있다는 그 곳을 구경하러 갔다 온 할머니. 버스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어르신들을 태운다는 걸 보면 규모가 크긴 큰가 보다. 더 자세히 얘기를 나눠보니, 세상 물정 모르는 어르신들이 거기서 강매를 당하는 모양이다. 동네 이쁜이 할머니는 전기장판 비스무리한 물건을 60만 원이 넘는 고가에 샀다고 했다.


"어머님도 거기서 물건 샀어요?"
"나는 암것도 안 사. 저녁마다 사면 돈이 을매나 들어가라고. 싱크대 냄새 없애는 거. 유리 닦는 거. 솥단지도 샀네. 국도 끓애먹고, 찌개도 해 묵고."

아무것도 안 샀다더니 목록이 계속 늘어난다.  어르신 지갑이 줄줄 샐까봐 가지 말라고 말렸다. 어르신은 내 말을 듣더니 비싸지 않다고 옹호한다. 인정하기 싫은 눈치다. '여우와 신포도'에서 포도를 못 먹은 여우에게 포도가 달다고 아무리 말해주어도 고개를 가로젓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산 비개가 어찌나 좋은지 세 개 남은 걸 다 사가더만."

그 분들도 다 속으신 거라고 말해도, 자기 합리화의 장벽은 강건하다. 옆에 있던 동갑내기 친구가 가지 말라고 해보지만 계속 갈 기세다. 볼 거리, 놀 거리 없는 시골에서 그런데 가는 것도 낙이겠다 싶어서 더 말려볼려다 관두었다.

구두 신은 할머니 딸이 사준 구두를 신고 좋아하시는 할머니
구두 신은 할머니딸이 사준 구두를 신고 좋아하시는 할머니최성규

바깥 마실을 자주 다니는 점심 할머니에게 요즈음 자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시골에서 보기 드문 파란 구두. 색깔 뿐만 아니라 모양도 곱다. 가죽도 좋고 마감처리도 잘 되어있는 제품. 못 보던 구두가 언제 생겼을까? 물 건너 미국에서 생활하는 딸이 어머니를 찾아왔던 것이다. 딸을 보러 어머니는 서울로, 어머니를 보러 딸은 한국으로. 두 모녀의 상봉, 그리고 구두 선물. 어머니를 위한 미국산 구두. 침상에 올라가려고 벗어놓은 구두가 한켠에 가지런하다.

한번 시작된 따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자식 자랑은 하지 말래도 한다는 말이 틀림이 없다. 몇 년 안에 따님이 한국 모 대학교에 교수로 들어오게 된다. 그 날이 오면 딸이랑 같이 지낼거라 했다. 옆에 가만히 있던 동갑내기 친구가 구두 신은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런 두 할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구두 #공중보건의 #한의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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