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평전
한겨레출판
<이완용 평전>(김윤희, 한겨레출판)은 우리가 그 동안 너무 몰랐던 이완용을 알아가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한겨레 출판이 지난 5월100명의 국내 역사 인물을 국내 연구자들이 제대로 조명하는 역사인물평전 시리즈를 펴내기 시작했는 데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이가 이완용이다.
참 구성이 흥미롭다. 다음이 안중근 의사, 그 다음이 <백팔번뇌>< 금강예찬> <조선독립운동사>로 우리 문학사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최남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최남선 역시 이광수와 함께 끝내 친일로 갔다. 안중근 의사가 매국노 이완용과 친일파 최남선에 둘려싸여 있는 모양새다.
'합리적 근대인' 이완용 우리 정치사를 보면 이념을 갈아탄 정치인들을 많이 본다. 그런데 대부분 진보에서 보수로 갈아타지 보수가 진보로 이념을 갈아탄 경우는 없다. 사람들은 이념을 갈아탄 이들을 '변절자'라고 부른다. 과연 이완용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매국에 이르게 되었을까.
글쓴이는 책에서 '매국노'라고 섣불리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근대인"이라며 "'충군'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또는 제국주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은 이성적 인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 모든 죄과를 이완용에게만 묻는 우리의 섣부른 평가에 새로운 시각을 준다. 이완용은 25세 때인 1882년,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해 4년이 지난 1886년 3월 24일 규장각 시교로 등용된다.
일제에 '반일'로 찍힌 친미주의자 이완용그리고 이완용은 1887년 11월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미국을 다녀와 미국물을 먹었고, 1888-1890년까지 주미대리공사를 지내면서 서구 문물에 눈을 뜨고, 조선을 서구사회로 만들고 싶어하는 친미주의 성향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그 나라의 부강함이 무엇 때문이지 고민했을 것이고, 조선이 부유해지기 위해선 미국의 어떤 것을 모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판단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양반관료로서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그는 조선 정치체제를 크게 바꾸지 않은 채 미국과 같은 부강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51쪽)이처럼 이완용은 대한제국 체제 내에서 부강한 나라를 꿈꿨던 실용주의자였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8년 독립협회운동을 통해 체제 변혁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현실주의자로 변모한다.
지은이는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분노할 현실은 없었다"고 말한다. 자기 희생을 통해 변혁 주체가 되어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체제가 한반도에 등장해 청나라와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확신은 그에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치입문 초중반기까지 이완용은 '반일'이었다. 의외다. 1894년 갑오개혁 소용돌이 속에 일본 공사관 서기관 히오키 마쓰보고서에는 정동파(친미파)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이완용이 반일에 섰다고 말한다.
"금후 시국이 변할 때에는 다시 어떤 파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 금일의 정세로 논단한다며 일본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기색이 날로 치열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를 일본 배척파라고 추정해도 틀림없다고 확신한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서광범 이완용 이윤용을 지목해 이들은 일본을 배척하는 기색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69쪽)그런데 마쓰 보고서 "금후 시국이 변할 때에는 다시 어떤 파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이라는 분석이 묘한 여운이 남는다. 지금은 친미·반일이지만 언제든지 친일도 돌아설 수 있는 것이다. 맞았다. 이완용은 11년 후 을사늑약을 통해 친일도 모자라 매국에 들어선다.
실용주의자 이완용, 친일 그리고 매국그는 고종에 대한 의리만 지킨다면 왕조가 무너져도 별 상관이 없었다. 자기 선택이 원칙에 위배되고 매국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그랬기에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할 수 있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최익현은 "황실의 보존과 안녕이라는 그들의 말을 진실로 믿으십니까?"라는 상소로 고종 황제를 강하게 비판하고, 이완용 일파를 '매국적'으로 규정한다. 이에 이완용은 1905년 12월 8일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새 조약의 주된 취지에 대해 말하자면,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묘사직은 안녕하고 황실도 존엄합니다. 다만 외교상의 한 가지 문제만 잠시 이웃나라에 맡긴 것인데,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208쪽)외교권이 없는 나라가 어찌 독립국가이며, 종묘사직과 황실이 어떻게 존엄한가. 결국 이 상소는 변명에 불과했다. 이후 이완용은 '매국노'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이완용은 생전에 자기가 팔아 먹은 대한제국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