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균 강정마을회장(가운데 빨간 옷)이 구럼비 바위 위에서 연대온 사람들에게 강정마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 회장은 지난 8월 26일 구속됐다.
노동세상
강달프에게 "공권력 투입은 절대 안 돼!"오늘밤 불침번을 설 삼촌들이 모였다. 강정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해군기지 얘기가 나온다.
"우리가 출력 나와서 닦은 길인데 왜 해군들이 마음대로 한다는 거야?"한 삼촌의 불만 섞인 목소리다. 과거 제주도에선 길을 낼 때 집집마다 몇 미터씩 자갈을 깔라고 할당을 줬단다. 마을 사람들이 하루 종일 배를 타고 와도 자갈을 깔러 출력을 나가서 하나하나 닦았던 길들이 해군기지가 되게 생겼다.
해군은 서귀포시를 압박해 지난 7월 말 중덕 삼거리부터 중덕 해안으로 향하는 농로의 용도폐지를 이끌어냈다. 강정마을에서 공사 해안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다. 해군은 이곳에 출입 제한용 가림막을 치겠다고 시시탐탐 노리고 있다. 경찰병력과의 충돌은 이 때문에 계속 일어나고 있다. 3일 전에도 태풍 피해를 복구하고 있는데 들이닥쳐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다른 삼촌이 "그 형님만 살아계셨으면 최민수한테 한 번 연락해보는 건데…" 한다. 스킨스쿠버를 하기 위해 영화배우 최민수가 1년이면 몇 번씩 강정 앞바다에 왔다는 거다. 강정 앞바다엔 희귀종으로 천연기념물인 연산호 군락지가 있어 스킨스쿠버들 사이에선 유명하다. 멸종위기종인 '붉은발 말똥게'가 있는 등 강정마을은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보전지역의 핵심지역으로 제주도는 이곳을 절대보존구역으로 지정하기도 했었다. 이를 2009년 12월 한나라당이 주축인 제주도의회가 절대보존구역 지정해제 결의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이와 관련한 변경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하기도 했지만 법원에서는 무효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최민수를 안내하곤 했던 주민의 죽음조차 안타깝다는 이들의 절박함이 전해진다.
고성림 삼촌은 군사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내비친다.
"내가 삼국지 등 병법서를 통달했는데 여기 바다는 병법에도 없는 곳이야. 우선 요새가 아니야. 훤히 보이잖아. 해군은 대양해군(남방해역의 해상교통로 보호와 원양작전능력 향상)전략이라고 하는데 이건 미국과 중국, 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거야. 나는 그럴 돈 있으면 통일에 쓰라고 말하고 싶어."밤이 깊었다. 농성장 옆에 놓인 컨테이너 박스에서 미량씨와 시민사회단체 오늘 밤 당번인 서귀포 여성회 회원들이 회포를 풀고 있다. 바닷가에서 자란 여성들의 옛이야기가 꼬리를 문다.
"바닷가에서 땔감 모아와 통조림이나 분유통 올려놓고 바다에서 잡은 고메기(고동)나 보말 끓여 먹었잖아."(서귀포 여성회원)"우리도 그랬어. 돌김 긁으러 다니고…."(미량)"탈(산딸기)도 많이 따먹었잖아. 꽂대에 꼬치처럼 꽂아서 먹었지."(서귀포 여성회원)"여기 들어오는 골목부터가 죄다 탈이었어. 이런 추억이 다 녹아있는 바다를 해군이 빼앗으려는 거잖아. 내 추억을 망치지 말라고!" 해군기지는 미량씨의 추억을 삼켜간다. 온 마을 사람들의 추억도 앗아간다. 방금 전 한 삼촌이 했던 질문에 누가 답할까. "옛날부터 아이들한테 나 죽으면 화장해서 중덕해안가에 뿌려달라고 했어. 근데 해군기지 생기고 나 죽으면 내 혼은 어디로 가야하는 거야?"
중덕해안에 뿌려 달라고 한 내 영혼은 어디로날이 밝았다. 그냥 눈이 떠졌다. 자연의 힘인가. 중덕해안으로 향한다. '구럼비 바위에서 바다를 봐봐라. 그럼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강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는 구럼비 바위가 있는 곳이다. 1km여에 이르는 수만개의 바위가 연결돼 하나의 바위를 이루는 국내 유일한 바위습지다. 제주 올레 7코스의 중심이기도 하다. 이 바위가 해군기지 공사로 콘크리트에 매장될 처지에 있다.
구럼비 바위에 올라서 앞을 본다. 바다다. '쏴~아' 철썩, 잔잔하게 다가오던 물결은 바위에 부딪히자 이내 크게 포물선을 그린다. '휘~이잉' 바람소리가 뒤섞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새소리가 이 아름다운 음악회에서 자기 파트를 노래한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풍경이다. 이 고요가 깨지지 말았으면…. 저절로 빌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위 이쪽저쪽에서 손을 모으고 명상을 하는 이들이 보인다. 몸은 떨어져있어도 다같이 구럼비로 엮여있다. 바다와 하나인 이들이 '외부세력'이라고?
갑자기 비가 내린다. 중덕해안의 상징이 돼버린 '중덕사'에서 비를 피한다. 중덕사의 터줏대감 김종환씨가 김치찌개 끓이기에 여념이 없다. 중덕사는 2009년 8월 김태환 전 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투표가 실패로 끝난 직후 세워졌다. 종환씨가 한 주민과 함께 등산용 작은 텐트를 치고 지내고 있는데 고향 제주에 내려온 전 영화평론가협회장 양윤모씨가 합류했다.
이들이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을 받아내며 중덕해안을 지켜가자 이곳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텐트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넉넉한 천막으로 교체됐고 양씨는 그곳에 '부처' 그림을 모셔놓고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지키는 중덕사'라 이름 지었다. 제주해군기지 공사 방해 혐의로 지난 4월 구속된 양씨는 이후 옥중에서 71일간 단식투쟁을 진행했고 현재는 요양중에 있다.
종환삼촌이 이번엔 꽁치 통조림을 깐다. 점심 메뉴는 꽁치찌개다. 양파를 써는 칼질이 능숙하다. 젊었을 때 외지로 나가 참치회 가맹점을 했단다. 본사가 부도나면서 종환씨와 같은 가맹점들도 함께 망했다. 다시 고향 강정마을로 돌아와 일용일도 하고 감귤농사도 했다. 그러다가 '해군기지 싸움'이 벌어지면서 그 한복판에 서게 됐다. 그에게 중덕해안은 최고의 낚시터였다. 젊었을 때부터 짬만 나면 중덕해안으로 향했다.
"낚시를 하고 있으면 종종 고래 떼가 몰려와요. 수십 마리가 떼 지어 가는 모습이 얼마나 가관인지…."중덕사로 한 명 두 명 아침밥을 먹으러 온다. 찌개에 김치, 반찬 두 가지가 전부인 밥상인데 밥이 참 달다. 중덕해안의 맑은 물에, 식당을 했던 종환씨의 손맛이 곁들여져 만들어낸 환상의 조합이다. 쌀과 김치는 전국 각지에서 강정에 마음을 보태는 사람들이 보내주고 있다. 한끼에 40~50명의 식사 준비가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종환씨는 "밥식구가 늘수록 좋다"고 수줍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