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지태안군 소원면 집단학살 희생 장소
최태육
주민 간의 갈등을 국가권력이 이용- 태안·서산에서는 1950년 10월 중순부터 12월 말경까지 최소 1865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진실위는 파악했다. 태안지역은 보도연맹사건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의 민간인이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살된 곳이다. 왜 태안지역에서 가장 많은 수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보나? "주된 원인은 첫째, 주민 간의 갈등이고 둘째, 국가권력이 이를 이용한 점이다. 1865명의 희생자는 모두 부역혐의로 희생된 분들이다. 보도연맹 희생자와 적대세력에게 희생된 분들은 별도로 존재한다. 1950년 6월 말에서 7월 초경 약 300명의 보도원맹원이 서산 및 태안경찰서 소속 경찰에게 매지골 등 관내에서 학살되거나 대전으로 이송 중 학살되었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 시 또 약 350명의 주민들이 적대세력에게 희생되었다.
태안면을 비롯해 현재 태안군에 속한 모든 면은 당시 서산군에 속해 있었다. 또한 현재 당진군에 속한 정미면과 대호지면도 서산군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진실위는 사건명을 '서산태안부역혐의희생사건'으로 정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 정미면과 대호지면 희생사건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면에서 발생한 사건의 희생자를 포함하면 한국전쟁 중 서산에서 학살된 희생자는 최소 2600명으로 추정된다."
- 한국전쟁 당시 서산을 비롯해 충남지역 민간인집단살해 사건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정리할 수 있나?"이 지역 민간인희생사건은 보도연맹원 희생사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그리고 부역혐의희생사건이 상호 고리처럼 연결되어 연이어 발생했다. 맨 처음 군경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을 집단살해한 것이 직접적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이어 인민군 점령기에 보복적 차원의 집단살해사건이 있었고, 수복 후에는 상상을 초월한 잔혹행위와 더불어 대규모의 집단살해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경찰은 1950년 10월 수복 후 치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대한청년단과 치안대를 이용했다. 대한청년단과 치안대는 주로 인민군점령기에 적대세력에게 희생된 유가족과 우익청년, 그리고 면장과 이장을 비롯한 면 유지로 조직되었다. 한국의 치안당국은 지역의 치안확보를 위해 경찰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치안대 등 민간인 단체와 협력할 것을 전국에 지시했다. 결국 보도연맹원 희생사건과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에 의해 갈등의 골이 깊을 대로 깊어진 사이에서 경찰이 치안대 등 우익단체를 끌어들임으로서 갈등이 폭발했다.
태안에서는 수복 직후 적대세력에게 희생된 주민의 유가족과 대한청년단을 비롯한 우익세력들이 보도연맹원 희생자 유가족 등 수십 명을 쇠스랑과 같은 농기구 등으로 집단살해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앞에 언급했던 것처럼 치안대를 부역혐의자 처리에 개입시켰기 때문이다. 각 면 단위의 지서, 태안경찰서, 그리고 서산경찰서는 관할지역 부역혐의자처리를 지휘하면서 이들에 대한 체포, 구금, 취조, 분류는 물론 심지어 처형까지 치안대에게 맡겼다.
체포와 취조과정에서 온갖 가혹행위가 이루어졌다. 지서로 체포되어 들어오는 주민의 머리를 담을 쌓는 돌로 가격하는가 하면, 취조 중 가지를 대충 꺽은 참나무 몽둥이로 아무 데나 후려치기도 했다. 어느 곳에서는 면사무소 농가창고에 사람을 가두고 우익학생들이 몽둥이로 사람들의 머리를 후려치는데, 똥을 쌀 정도로 가혹했다. 심지어 이 학생들이 주민들을 직접 처형하기도 했다.
취조 도중 이루어진 가혹행위로 사망하는 주민들이 속출했다. '분류'는 치안대 감찰부가 조서를 먼저 작성하여 지서주임에게 올렸고, 이를 토대로 치안대와 면유지들, 그리고 경찰과 지서주임이 "가, 나, 다"로 분류 했다. '가'급에 해당되는 이들은 대부분 관할지역 내에서 처형되었다.
이른바 불법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특별조치령'조차도 적용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부역혐의자들이 치안대와 지서경찰의 협의로 이루어진 임의적 판단에 의해 즉결 처형되었다. 이렇게 희생된 주민들이 10월 중순부터 12월까지 1865명이었다. 진실위는 참고인진술과 문서자료를 토대로 희생자 이름·주소·생년월일·희생경위·가해주체·지휘명령계통을 파악하였다.
문제는 주민들 간에 죽고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국가권력에 책임이 있다. 북한정부도 한국정부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권력이 자신의 치안확보를 위한 폭력에 주민들을 동원했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것이었고, 후유증도 매우 컸다. 그 결과 주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겼고, 60년이 흐른 지금도 그 상처와 갈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