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선생에게 성폭행 당한 동생이 자살한 민수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관객들을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는 이 장면은 침묵하는 진실에 대한 절규다.
(주)삼거리 픽쳐스 (주)판타지오
그러나 안개가 짙을수록 내밀한 속살도 드러나기 마련인 법. 관객들의 시선을 흡입하는 이가 있으니, 인호입니다.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와 달리 영화 속 인호는 몇 가지 각색을 거친 인물입니다. 그가 싸움을 포기하고 소멸하듯 무진을 빠져 나오는 소설 속 결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 인호를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얽히고설킨 '침묵의 카르텔'에 정면으로 맞서게 합니다.
대학 스승인 김 교수의 추천으로 자애학원에 부임한 인호는 '학교발전기금' 요구를 거절하지 못합니다. 천식으로 고생하는 그의 딸을 돌보는 늙은 노모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전세금을 빼선 한 칸짜리 방으로 이사합니다. 재판이 열리고 법정에 온 노모는 "니 한 몸 건사하고 가족들 먹여 살리려면 옳은 일 옳은 소리만 하고는 못사는 기다"며 아들을 말립니다. 그런 인호에게 한 눈 팔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인호로 하여금 침묵의 대가를 뿌리치도록 합니다. 법정 밖 공간에서 벌어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는 아이들과 함께 길어 올린 진실에 정직한 태도로 임합니다. 자신이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유리가 그의 등에 업혀 "선생님이 아빠였으면 좋겠다"는 장면에서처럼, 안개를 걷어낼 수 있는 '소리'조차 상실한 아이들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재판 과정을 지켜본 노모도 먹을거리를 아이들에게 건네며 응원합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진실 안으로 뛰어드는 것만큼 소시민들에게 곤혹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타협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고 어느 순간 진실의 정반대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해고된 인호와 소주잔을 나누던 유진이 툭 던진 말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은 귀를 틀어막을 지더라도, 끝까지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다움이 있기에, 우리들이 찾는 희망은 허상이 될 수 없다는, 영화의 또 다른 메시지가 관객들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는 거예요."1년 후 서울 지하철 구내. 영화는 '안개의 도시, 무진시로 오라'는 광고판을 클로즈업합니다. 인호의 얼굴과 광고판을 교차하던 카메라가 멈춰 서자 자애학원의 음습한 기운이 스멀스멀 뿜어져 나옵니다. 더 짙고, 더 깊숙이, 더 낮게 끈적이며 엄습해 오는 안개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뒤덮을 태세입니다.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된 '침묵의 카르텔'로 진실을 은폐하는 곳이 무진시 뿐인 줄 아느냐는 듯이.
광주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6년째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 '침묵의 카르텔'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대책위의 주장과 여러 보도를 종합하면 학교 재단인 사회복지법인 우석은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사과하지 않았으며, 사건이 터지자 물러났던 친인척들은 재단에 복귀했습니다. 최근에는 학교이름 세탁과 법인 정관변경 등을 추진하며 수용시설 확장마저 꾀하고 있습니다. 또한 피해 학생들에게 약속한 치유와 보상은 공염불이 됐지만, 학교 예산은 꼬박꼬박 지원해 왔습니다.
우리들이 믿어 온 가치들이 퇴색하고, 우리 앞에 놓인 진실을 기억하지 않으며, 현실이 갈수록 비겁해질 때, '지옥의 도가니'는 기승을 부리고 한국사회를 관통합니다. 소설 <도가니>는 '지옥의 도가니'가 어떻게 현재진행형인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 그 사람들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점수, 점수, 점수, 경쟁, 경쟁, 경쟁 속에서 남을 떨어뜨리고 여기까지 왔어요. (…) 그런데 그들이 정신능력 떨어지는 장애아들 몇 명 때문에 처삼촌과 대학동창 사돈과 사위의 은사와 장인의 후배와 얼굴을 붉혀가며 그 정의라는 거, 진실이라는 거 되찾아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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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정신에 따른 훈육?...그들은 짐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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