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가을빛이 완연한 궁
이정근
가을바람이 스산하다. 푸른 잎새를 자랑하던 명례궁의 나무들이 하나 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옷 매무새를 고쳐 입는 모습과 흡사했다. 수양과 마주 앉아 있는 한명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리! 이제 결심할 때가 되었습니다.""너무 서두르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안평이 해주와 포천으로 유람 다니는 것으로 보아 마음을 놓은 듯합니다.""사냥을 핑계되었지만 무부(武夫) 훈련이지 않느냐."안평의 사냥터에는 한명회가 밀파한 첩자가 섞여 있었다. 실시간 보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
"무사다운 무사는 하나도 없다 하옵니다. 오합지졸은 훈련해도 오합지졸이고 무사는 쉬어도 무사(武士)입니다."안평이 몰고 다니는 장정들은 고기나 얻어먹자고 따라다니는 오합지졸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권람과 홍달손을 불러오라."순간적인 머리 회전은 한명회를 따라올 자 없지만 그래도 미더운 것은 권람이었다. 한명회가 쓴 편간을 쥔 하인이 튀어나가고 솟을대문이 닫혔다. 그 때였다. 이징석이 불쑥 찾아왔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다.
예민한 후각으로 판세를 읽은 이징석의 줄타기이징석은 탐나는 무사다. 하지만 그의 동생 이징옥이 김종서 뒤를 이어 함길도 절제사로 나가있을 뿐만 아니라 철저한 김종서 추종자다. 더구나 최근에는 그의 동태가 수상하다. 형제 간에 우애가 좋지 않아 의절하고 지낸다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가. 아무튼 껄끄러운 존재다. 그가 예고 없이 찾아왔다니 의외였다.
"요즘 조정 돌아가는 꼴을 보면 열불이 나서 못 보아 주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대군 나리!"이징석이 자리에 앉자마자 열변을 토했다.
"전하께서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나이가 어려도 그렇지, 환관인가 내신가 하는 그 작자들. 임금님이 어리면 더 지극정성으로 모셔야지 대신과 대군의 수족이 되어 그들에게만 꼬리를 흔들고 있으니 이거야 원, 그들이 나라의 녹을 먹는 환관입니까? 개인의 사견(飼犬)입니까?"아버지 상중에 동생 징옥을 구타하리만큼 괄괄한 성미 그대로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날렸다. 무과에 장원급제한 이징석은 사복시 소윤으로 출사하여 좌군총제가 되어 도원수 최윤덕을 도와 파저강에 침입한 야인을 평정한 공으로 중추원사에 오른 강골 무사다. 허나, 동생 징옥의 청렴을 '복 없는 사람의 별호'라 조롱하리만큼 재물에 욕심이 많아 탐관오리로 지탄을 받은 인물이다.
"김정승과 안평대군도 그렇지. 환관들이 환관답지 않은 길을 가면 바로 잡아주어야 할 위치에 있는 양반들이 환관을 생일에 초청하여 재물이나 쥐어주고.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안평대군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대군 나리!"부인 상중에 생일을 맞은 안평은 마포강가에 자리잡은 그의 별장 담당정에 환관 김연·김득상·이귀·최득상·한송·최습·최언·조희를 불러 술을 먹이고 선물을 주어 보냈었다.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성토하던 이징석이 문사찬(文士贊)과 무사찬(武士贊)을 읊조렸다. 요순시대의 명신 고요(皐陶)와 기(夔)의 충절을 풍자하는 시다. 자신에게 흠이 있지만 수하로 받아달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다. 엄중하고 하수상한 시기. 예민한 후각으로 판세를 읽은 이징석의 곡예다.
한 사람의 무사라도 긴요한 수양. 이징석을 얻으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다. 그가 비록 김종서만큼 무인들의 존경을 받는 위인은 아니지만 아랫것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우두머리 기질이 있어 따르는 자들이 꽤 있다. 갈등이 밀려왔다.
이징석과 이징옥의 불화. 비록 동모형제이지만 자신과 안평을 대입해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이 안평에게 칼을 겨누고 안평이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지 않은가. 남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자신은 속속들이 이해할 것 같았다. 어쩌면 남남보다도 더 적극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수양을 유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