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스승을 떠나보내고 역으로 돌아오다

[오마이 인터뷰 ⑥] 한국 현대 무용의 선각자 고(故) 박외선 제자, 정귀인을 만나다

등록 2011.10.13 15:55수정 2011.10.14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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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에게 올리는 편지

                   마 종기 


평생을 무용만 온 몸에 그리시며
순정한 예술가의 꿈속에서 사신
사랑하는 어머니, 오늘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깨끗한 영혼의 당신이
이미 영생의 길에 서신 것은 알지만
아름답고 자유로운 세상을 춤 속에서 사시며
한 생애를 뜨거운 열정만으로 살아내시고
표표히 빈손으로 미소하며 떠나신
아름답고 거침없는 우리 어머니,
오늘은 내가 외로워 당신을 부릅니다.

언젠가 예술가는 세상을 사랑해야하고
마음이 늘 외로워야한다고 하신 말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혹시 외로우셨나요?
당신 평생의 의미는 무용의 외길이었습니다.
예술만을 향한 끝없는 열정과 사랑이
결국은 당신의 말년을 이끌어준 동력이 되었고
당신을 보호해준 후광이 되었습니다.

...(중략)

끝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다시는 뵙지 못하겠지만
당신의 크고 한정 없던 사랑의 기억을 등불삼아
내 나머지의 생, 당신을 그리며 살겠습니다.
어둡고 외로울 때는 당신을 다시 찾겠습니다.
슬프고 아플 때에도 당신을 찾겠습니다.
당신은 여전하신 따뜻한 모습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를 보듬어주세요.
내 종신의 날까지 내 곁에 계셔주세요.
아무 때나 내게 다가와 환하게 웃으시는,
멀리 떠나신 사랑하는 어머니.


 이 시대의 춤꾼, 정귀인
이 시대의 춤꾼, 정귀인송유미

지난달 3일 한국 현대무용의 선각자, 박외선 무용가(전 이화여대 교수)가 미국 시카고 자택에서 별세했다. 고인의 장례식과 영결미사는 6일 오전 시카고의 정하상 바오로 한인 성당에서 있었다.

이 부고를 듣자 마자 선 걸음에 태평양 바다를 단숨에 날아가서 스승을 떠나보내고 돌아온 정귀인 춤꾼(부산대학교 무용학과 교수)은, 박외선 무용가의 수제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안타갑게 먼 타국에서 세상을 뜨신 스승을 떠나보낸 슬픔을 모교(이화여대) 교정에서 고인의 후학 등과 함께 나누기 위해 '박외선 스승을 위한 추모제'를 갖은 바 있다. 


이런 그가 고인이 되신, 스승 박외선 무용가의 생전의 추억과 사랑을 기억하며 창작한 안무 작품 <역>을, 다가오는 25일 부산의 금정문화회관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에 지난 11일 부산대학교 정문 앞 작은 찻집에서 만났다. 아래는 인터뷰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옮긴 것이다.

-새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나라 현대무용의 선각자로 알려진 박외선 무용가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해 주시면 합니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 그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고 나서)…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제 가슴이 진정될지 모르겠습니다. 박외선 선생님은 재미 시인 마종기씨의 모친이자 아동문학가 마해송(1905~1966) 선생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박외선 선생님은 세상이 다 알다시피 우리 나라 현대무용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62년 이화여대 무용과 설립에 산파 역할을 했습니다. 정말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무용계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은 분이십니다."

-평소 정선생님께서는 고인 박외선 선생님을 친어머니처럼 섬기셨다는 입소문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말과 달리 정선생님과 박외선 선생님의 사제간의 귀한 사랑은 많은 사제간의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두 분의 각별한 추억이 있으시면 허물없이 얘기해 주시면 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1년에 이화여대 무용학과에 입학했을 때였습니다. 아름다우시고 어린이 같이 순수한 표정을 가지신 선생님을 뵈었을 때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계신  듯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셨습니다. 

저는 학생시절 선생님 연구실에 조교로 지내면서 선생님을 좀 더 가까이 모시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가끔은 점심도 잊으시고 수업에 몰두하셨고, 늘 여러 학생들과 말씀을 나누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다정한 선생님의 성품이 늘 많은 학생들을 가깝게 끌어들이는 원동력이 되어, 선생님 주변에는 늘 즐거운 웃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제가 부산대학교에서 교수직을 갖게 된 후 선생님이 한국에 오실 때는 저를 만나러 부산에 오시곤 했습니다. 대학교의 젊은 학생들에게 춤에 대한 선생님의 당부도 늘 잊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늘 한국을 그리워하셨습니다.

조국의 모교에 무슨 행사가 있다고 하면 그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흔쾌히 한국에 오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한국을 너무 그리워하셔서 9년 전쯤, 88세의 연세에 홀로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 선생님은 저의 집에 몇 주간 머무르셨고 선생님과 저는 정말 많은 옛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저에게는 꿈만 같았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매일 선생님께 맛난 음식도 해드리고 선생님과 함께 목욕도 하고, 하루종일 선생님과 보내는 시간들이 소중했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집에 계시는 동안 저는 옛날 제자들을 불러 선생님을 만나게 해드리면 너무나 행복해 하시며 지난 시절을 추억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스승과 함께...(좌) 정귀인 춤꾼, (우)박외선 무용가
아름다운 스승과 함께...(좌) 정귀인 춤꾼, (우)박외선 무용가정귀인 현대무용단


그후에도 저는 시카고로 전화를 드려 선생님과 전화상으로 안부를 여쭈었습니다. 늘 목소리가 밝고 명랑하셨던 선생님이 기력이 차츰 쇄진해지시는듯 했습니다. 정말 선생님이 돌아가신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 저 컨의 하늘이 내려앉는 듯 멍하게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당일 표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으나 비행기 출발 몇시간 전, 기적같이도 누군가가 미국행을 포기하게 되어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선생님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저를 만나고 싶어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분명히 천사들과 함께 저 세상에서 훨훨 행복하게 춤추고 계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침묵 후) 선생님은 한 줌 재가 되어 먼 미국땅에 묻혀 계시지만 선생님의 영혼은 저의 가슴속에 늘 함께 하시고 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손수건으로 흥건한 눈물을 닦으며).

 그니를 보내다...그 역에서
그니를 보내다...그 역에서정귀인과 현대무용단

고인이 되셨지만 <역>을 보러 오실 것만 같아…

-돌아가신 박외선 스승님을 위해 이번 작품 <역>을 안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어떤 작품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작품의 안무 의도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주시면 합니다.
"스승 박외선 선생님은 제 생애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기억됩니다. 해서 먼 땅 미국 시카고에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픈 부고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이제 이승에서의 여행길을 마치고 마침내 하늘나라로 훨훨 춤추시며  떠나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 박외선 무용가를 추모하며....<역>을 안무하다
고 박외선 무용가를 추모하며....<역>을 안무하다정귀인과 현대무용단

사실 나는 늘 누군가를 보내는 일을 반복하면서, 인생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간이역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보곤 했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지금의 간이역에서 나는 여러 모습의 군상과 다양의 삶을 경험합니다.

역은 늘 누구에게나 설레임과 기대를 갖게 하며 또 그리움과 추억이 함께 서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역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종착역을 향해 매일매일의 일상의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역>은 사랑하는 은사님, 박외선 선생님을 떠나보내면서 느낀 여러가지 회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선생님의 젊은 시절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나의 모습이자, 또 많은 사람들의 사랑, 열정, 고독, 죽음, 외로움 등 인간세의 말(언어)로는 다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세계를 춤의 언어(몸짓)으로 풀어내려 무척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선생님께서도 기쁘게 이 작품을 보시러 오실 것 같습니다."

 한 노숙자의 시선으로부터의 삶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접근
한 노숙자의 시선으로부터의 삶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접근정귀인과 현대무용단

춤을 추기 전에 인간이 되자

-누구나 스승을 대하는 마음은 각별하지만 정선생님의 스승에 대한 마음은 더욱 각별한 듯합니다. 두 분의 평소 사제간의 사랑을 어떻게 키워오셨는지요 ? 
"박외선 선생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예술가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업 시작 전에 "춤을 추기 전에 인간이 되자"라고 칠판에 써놓으시고는 이 글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시고 수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혼을 가지고 춤을 춰라"라고 말씀하시며 진정한 예술혼과 진솔한 춤을 강조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누구에게도 아부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춤 하나만을 생각하며 사셨습니다. 또한 제자들과 대화하기를 아주 좋아 하셨습니다. 지금 한국 무용계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는 무용가들은 대개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항상 선생님의 따뜻함과 순수한 열정을 그리워 합니다. 선생님은 수업 중에 즉흥적으로 춤을 추시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감성적이셔서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은 어김없이 선생님의 독창적인 춤사위로 저희를 감동 시켰습니다. 그만큼 춤에 대한 열정과 창의성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역
정귀인과 현대무용단

대학시절 저는 무용을 그만두면 어떨까하고 마음 먹은적이 있었습니다. 춤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의논을 드렸습니다. "외형적인조건으로  춤을 추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무용가가 되려면 진솔하게 자신을 사랑 할 줄 알아야하며, 내면을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더욱 힘을 얻어 무용 공부에 전념 할 수 있었습니다.

또 언젠가 춤에 자신을 잃고 고민하다가 선생님께 "제가 춤에는 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겉으로 드러나는 재주가 있는 사람도 있지만, 내면에 뛰어난 안무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너는 내면에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격려 해주시어 또 한번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충고 덕분에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했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선생님께서 정년퇴직을 하시고 아드님 마종기씨가 계시는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오하이오주에 계시다가 춤에 대한 열망으로 교육을 계속 하시기 위해  LA로 가셔서 박외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셨습니다.

그즈음, 저는 무용경험을 넓히고 공부를 더하기로 마음먹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현대무용을 미국에서 더 깊게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자극을 받아 떠난 유학이었습니다. 제가 뉴욕에  있는 동안 선생님은 가끔씩 뉴욕으로 오셔서 학교를 방문하여 저의 춤을 보시기도하고 공연장도 가고 정말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천진스럽게 뉴욕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행복해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제가 귀가할 즈음에 저녁을 지어 놓으시고 아파트 문 밖에서 저를 기다리시던 기억은 너무 인상 깊습니다.

당시 방학때면 저는 선생님이 계시는 LA로 가서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연구소에 수업을 맡아 선생님을 돕는 일을 즐겁게 하곤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LA에서 가끔씩 졸업생들과 함께 하시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밤이 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장시간 인터뷰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공연이 되길 바랍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좋은 공연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정귀인

정귀인과 현대무용단의 작품은 ?
<동동>,<축제시리즈>,<흙>,<바람의 말>,<산사에 뜨는 달>,<어머니의 등>,<회회바람>,<토우시리즈>,<보자기>,<가시리>,<D-30>,<강>,<벌교의 달> 등 87편. '정귀인과 현대무용단'의 작품들은 대개 삶의 진실과 참된 인간상 추구및 한국의 토속적 정서를 형상화하는데 주력한다.

덧붙이는 글 | 정귀인 무용단 기획공연 <역-0시에 기차는 떠나네> 공연은 2011. 10. 25(화) 늦은 7시 30분, 부산 금정문화회관 대공연장이다. 공연문의는 mail; kicdance@naver.com


덧붙이는 글 정귀인 무용단 기획공연 <역-0시에 기차는 떠나네> 공연은 2011. 10. 25(화) 늦은 7시 30분, 부산 금정문화회관 대공연장이다. 공연문의는 mail; kicdance@naver.com
#박외선 #정귀인 #이화여대무용과 #부산대 무용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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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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