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지 <타임>의 스티브 잡스 추모 특집판.
<타임>
2011년은 애플에 잊을 수 없는 해로 기억될 것이다. 올해 애플은 정유회사 엑슨모빌을 제치고 세계 최대기업으로 부상했다. 쫓겨났던 잡스가 몰락해 가던 회사로 복귀한 지 14년만의 일이다. 같은 해 잡스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2011년은 애플이 사상 최고 히트상품을 내놓은 때이기도 하다. 바로 아이폰4S다. 이 새 아이폰은 판매 개시 후 사흘 만에 400만대 이상을 팔아치우는 신기록을 세웠다. 아이폰4S는 전문가들을 가장 버름하게 만든 상품이기도 하다. 새 아이폰이 공개됐을 때 온갖 전문가, 분석가, 전망가들은 언론, 블로그, 트위터를 통해 분노에 가까운 실망감을 토해낸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매 개시 후 폭발적 반응이 나타나자, 머쓱해진 그들은 '유작효과'라며 '죽은 잡스가 제품을 살렸다'고 둘러댔다. 정말 제품은 달라진 게 없는데 사람들이 죽은 잡스를 위해 '애도구매'를 해 주는 걸까? 하지만 별로 새로울 게 없다던 그 전문가들이 낯을 바꾸어 새 운영체제(iOS5)와 음성명령 체계인 '시리(Siri)'를 침 튀겨가며 칭찬하기 시작한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반엘리트적 기술대중주의전문가들의 '헛발질'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상황 파악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애플이 제품을 공개하고, 전문가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대중이 열광하고, 이윽고 전문가들도 따라서 열광하는 현상은 이미 수년간 반복되어 온 일이다. <뉴욕타임스>의 기술칼럼니스트 데이빗 포그는 이 양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1) 애플이 신제품을 공개한다. 2) 블로거와 업계 전문가들은 그 제품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분석한다. 3) 판매에 들어가고, 소비자들은 못 사서 환장한다. 모든 회사가 애플을 모방한 제품을 내놓는다.애플 제품에 대해 소위 '전문가'들과 대중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런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간극의 원인을 살피는 것은 애플의 철학과 전략을 이해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애플에게 기술은 경외의 대상이 아닌 활용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즉 첨단 기술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 애플의 기술철학인 것이다.
애플의 이런 '기술대중주의'가 전문가 집단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술적 지식을 갖춘 소위 '테키'들은 기술의 쓰임새보다 기술 자체를 추앙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 엘리트주의' 시각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쉬운 제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아이패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 '애들 장난감'이라고 조롱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애들 장난감'이란 평가는 애플에 모욕은커녕 더없는 찬사였다. 실제로 가끔 말조차 못 배운 아이들이 아이패드를 익숙하게 가지고 노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첨단 기기를 코흘리개도 쓸 수 있게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패드나 아이폰처럼 무한대로 기능이 확장되는 단말기를 사용설명서 하나 없이 내놓을 수 있던 비결은 단순함과 직관에 대한 애플의 (거의 강박에 가까운) 집착 때문이다.
완결성에 대한 집착과 폐쇄주의
제품이 단순하려면 그 자체로 완결된 기능과 형태를 지녀야 한다. 복잡하게 연결하거나 확장하지 않고도 고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뭔가 더하고 변형해서 성능이 나아진다면 제품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고, 제품이 완전하다면 더하고 변형하는 것은 제품의 완결성을 떨어뜨리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어떤 식으로든 제품 자체에 개입하려고 애쓰는 해커들의 시도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곤 했다. 애플 제품을 물리적으로 뜯어고치는 행위는 물론, 다른 기기들을 연결해 '확장'하려는 행위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른 회사 제품과 달리 주변기기 연결용 단자 제공에 인색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아이패드에는 그 흔한 유에스비 포트 하나 달려 있지 않다. 전문가들은 이 '중대한 결함'을 '아이패드가 실패할 이유' 가운데 하나로 거론했다.
하지만 아이패드는 '못 사서 환장하는' 물건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전문가 자신들의 애장품이 되었다. 지금처럼 민망한 상황이었으나, 잡스가 살아 있던 탓에 '유작효과' 핑계를 댈 수는 없었다. 조용히 애플매장 앞에 줄을 서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10월 24일 공개된 잡스 전기를 쓴 아이작슨은 <타임> 잡스 추모 특별판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해커와 고급 사용자들은 기성제품을 이리저리 고치고 바꿔 자신의 물건으로 만들기 일쑤다. 잡스는 이런 짓이 소비자들에게 완전한 사용 환경을 제공하는 데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해커이자 동업자였던 스티브 워즈니악은 생각이 달랐다. 워즈니악은 애플II에 슬롯 8개를 달아주자고 했다. 사용자들이 원하면 여분의 기판과 주변기기를 연결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잡스는 내키지 않았으나, 마지못해 동의했다. 하지만 몇 년 후 매킨토시를 내놓을 때 잡스는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다. 여분의 슬롯이나 포트를 모두 없애는 것은 물론, 특별 제작한 나사를 써서 소비자들이 아예 컴퓨터를 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 월터 아이작슨, "미국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타임> 특집호 2011년 10월 17일 35쪽. 잡스의 이런 접근은 '폐쇄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시장 확대를 어렵게 했고, 급기야 애플을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달리 다른 컴퓨터 제조업체에 애플의 소프트웨어를 쓰지 못하게 한 탓이다. 애플의 소프트웨어는 애플의 하드웨어를 통해서만 기능과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