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스페인 여성 실비아는 석사 학위(홍보 부문) 소지자다. 실비아는 지금 다국적 회사에서 풀타임(full-time) 인턴으로 일하며 월 300유로(약 47만 원)를 받고 있다. 옆자리에 있는 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대우는 천양지차다. 월급에서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실비아는 각종 수당을 비롯한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실비아는 부모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급여가 턱없이 적어 독립 계획을 실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300유로의 급여는 대부분 버스비와 점심값으로 쓰인다.
실비아가 이렇게 산 지도 2년이 넘었다. 상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최근 실비아는 '이런 상황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다.
실비아는 자신을 고용한 회사가 자신처럼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 사용을 제한하는 규정을 어기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회사에 대한 불만을 노동 당국에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일자리가 있다는 점에서 자신은 그래도 복을 받은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비아는 대학 졸업반 동기 30명 중에서 자신이 그나마 처지가 나은 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렸기 때문에 부모님은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대학 학위를 취득하라고 내게 권하셨다. 어쨌든 일자리가 있다는 점에서 난 운이 좋은 편이다."
<로이터통신>이 17일(현지 시각) 보도한 실비아의 사연이다. 실비아는 직장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자신의 성(姓)을 공개하는 것은 꺼렸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실비아를 비롯해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일자리 문제의 심각성을 보도했다.
"월 1000유로짜리 임시직이 괜찮은 일자리가 됐다"
남유럽의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는 최근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관련 기사 : 가톨릭 국가에서 '교황 방문 비판' 대규모 시위). 스페인은 이 중에서도 실업률이 높은 나라다. 스페인의 실업률은 21%, 25세 이하 청년 실업률은 46%에 달한다. 유럽연합 국가들 중 최고 수준이다. 또한 스페인 노동자의 1/4은 임시직으로, 유럽연합 평균(14%)보다 높다. 포르투갈 노동자의 23%도 임시직이다.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크 잡(junk job)'이라 불리는, 처우가 좋지 않은 일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예전에는 보통 관광, 농업, 건설 부문에서 볼 수 있던 임시직이 이제는 모든 직종으로 퍼지는 추세다.
이 때문에 세 나라의 노동시장에서 '경직된 이중 체계'를 관찰할 수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진단했다. 한 층은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안정적인 직종의 중년층이다. 이들은 법령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기업이 이들을 해고하려면 적잖은 비용이 든다. 또 한 층은 임시직의 회전문에 갇힌 젊은 노동자들이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이중 체계는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노동자들이 임시직에 오랫동안 묶여 있으면서 생산성이 떨어지고 남유럽 경제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
남유럽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이러한 문제를 상징하는 말이 '밀레우리스타(mileurista)'다. 밀레우리스타는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월 1000유로(약 157만 원)를 버는 임시직 노동자를 가리키는 스페인어다.
한국의 '88만원 세대'에 비견되는 밀레우리스타, 즉 '1000유로 세대'는 최근에 생긴 말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사항은 경제 위기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점점 더 깊은 미로에서 헤매는 '잃어버린 세대'가 늘었고, 그 결과 이제 월 1000유로조차 벌기 어려운 젊은 노동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노동 문제 전문가이자 현대사 교수인 호세 마리아 마린은 "우리는 밀레우리스타가 나쁜 것인 것처럼 말해왔다, 그러나 이제 밀레우리스타는 좋은 것이 됐다, 월 1000유로짜리 임시직은 괜찮은 일자리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탈리아 로마에 사는 27세 청년 페데리코의 현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페데리코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2009년 졸업했다. 그 후 페데리코는 직장을 옮겨가며 이런저런 임시직 일을 해왔다. 페데리코는 부모 집에서 독립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집을 빌리는 데 정규직 계약서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페데리코는 그동안 자신이 원하는 분야인 미디어나 마케팅 쪽 일자리를 찾아왔다. 그러나 15~24세 이탈리아 청년의 1/4 이상이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이제 페데리코는 구직에 필사적이다.
"때때로 좌절감을 느껴 수많은 이력서를 보낸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회사에도 보낸다. (……) 오늘 1년짜리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그 회사는 내게 하루에 10시간을 일하면 한 달에 500유로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맘에 들지 않는다."
페데리코는 이제 월 1000유로짜리 일자리조차 도달할 수 없는 꿈과 같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실비아와 마찬가지로, 페데리코도 불이익을 우려해 자신의 성(姓)을 공개하길 꺼렸다.
"영속적인 2류 일자리층"에 갇힌 젊은 노동자들
<로이터통신>은 1990년대 미국의 "영구적 임시직"과 유사한 "영속적인 2류 일자리층"이 남유럽에서 창출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들이 매년 임시직을 고용한 후 정규직과 같은 일을 시키는 현상이 늘어난 탓이다. 이것이 '노동시장의 경직된 이중 체계'를 강화해 경제성장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주택 및 소비재 시장까지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와 관련, 스페인에서 지난 10년간 새로 체결된 일자리 계약의 80%는 임시직 계약이다. 또한 네덜란드의 노동시장 전문가 루드 무펠스는 2008년 스페인에서 임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율이 20%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지난 15일, 금융가의 탐욕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시위가 전 세계에서 벌어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마에서는 20만 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또한 이날 벨기에 브뤼셀의 시위대에는 스페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긴축 정책을 규탄하고자 스페인에서 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브뤼셀까지 1700km를 걸어간 '분노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성난 목소리 뒤에는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각박한 현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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