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시위와 한미FTA가 관계 없다고?
지난 21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민주당 정동영 의원은 김황식 국무총리를 상대로 "한미FTA는 미국의 월가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김 총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김 총리는 또 "월가의 시위와 한미FTA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고, 둘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한미FTA가 2007년 체결 당시부터 월가식 금융시스템을 그대로 직수입하려는 게 핵심 목표였다는 것은 당시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의 보고서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특히 한미FTA 체결 직후인 2007년 7월 18일 청와대에서, 한미FTA 체결에 따른 금융산업 발전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개최된 '제2차 금융허브 회의'에서 재정경제부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날 회의에서 당시 재정경제부가 발표한 <금융 선진화를 통한 금융허브 구축>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노무현 정부 금융정책의 성과로 ▲ 금융산업을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 마련·추진(2003.12월~) ▲ 금융산업 발전을 선도할 자본시장을 육성하기 위해 '자본시장통합법' 제정(2007.7.3일 국회통과) ▲ '한미FTA 체결'(2007.6월말)로 선진금융기법과 신금융상품 적극 도입을 나란히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금융선진화를 위한 전략 과제 및 추진 방안'으로 ▲ 위험을 적극적으로 부담하여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투자은행(IB)의 출현과 육성 ▲ 파생금융상품(특히 CDO, CDS) 활성화 ▲ 연기금의 자산운용시장 투입 ▲ 사모펀드(PEF) 적극 육성 ▲ 헤지펀드 허용 ▲ 월가 출신 금융전문가를 경제부총리 자문관으로 영입 ▲ 재경부 금융정책 자문기구를 영·미 제도 전문가들로 개편 등을 제시했다.
그야말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일으킨 핵심 요소들로 구성된 월가식 금융시스템 도입에 우리 정부가 얼마나 혈안이 돼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보고서 내용만 보면, 마치 '미국 금융위기'를 통째로 수입하려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이 보고서는 또 자본시장통합법과 한미FTA가 이 같은 미국 월가식 금융시스템 도입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금융허브 전략'의 연장선이었음을 공개 천명하고 있다. 실제 그동안 이 보고서 방침대로 진행돼 왔고 그래서 탄생한 게 지금의 자본시장통합법이며, 이를 미국에게 보증받고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들려는 게 바로 한미FTA였다. 따라서 한미FTA는 미국식 금융신자유주의를 대한민국에 정착시키기 위한 종착역이자 완결판인 셈이다.
'검은 머리 미국인' 한미FTA 추진 주역들... 정권 대대로 '승승장구'
이날 제2차 금융허브 회의 참석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지난 2009년 1월 19일 이명박 정권의 제2기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임명된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이다. 윤 전 위원장은 이날 회의 발표에서 금융투자상품의 포괄주의 도입, 파생상품 도입을 위한 규제 완화 등을 금융선진화 과제로 제시해 노 정권의 금융허브 구축을 적극 지원했다.
또한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통상교섭본부장에 발탁돼 한미FTA 추진과 협상을 주도한 김현종씨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주UN 대사를 역임하다, 2009년 3월 돌연 삼성전자 해외법무 담당 사장으로 옮겨갔다. 그가 누구를 위해 일해왔는가를 짐작케 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첫 사장단 회의에서 "기업의 이익을 지키는 게 국익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삼성이 FTA 관련 가장 영향력 있는 로비스트를 영입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김현종이 프리메이슨 회원일 것"이란 비아냥도 있었다.
김종훈 현 통상교섭본부장은 바로 김현종의 후계자다.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FTA 협상 수석대표로 김현종을 보좌하다 그 뒤를 이어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승진한 사람이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재발탁됐다. 김종훈 본부장은 한-EU FTA와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수차례 거짓말·말바꾸기 논란과 번역 오류 사태 등을 일으키며 거센 사퇴 압력을 받았지만, 이 정권의 비호 아래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들은 모두 미국 경제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규제 완화와 자무유역(FTA)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다. 결국 이명박 정권도 노무현 정부의 금융허브 전략을 그대로 이어받아 '미국식 금융신자유주의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종착역이 바로 한미FTA 비준이다.
지금 미국 사회는 '99% 국민'의 '1% 부자'들에 대한 분노가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로 폭발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에 퍼져 거대한 '부자 증세'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월가식 금융시스템 도입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한미FTA 비준에 안달이 나 있다. 시대착오, 안하무인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