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통복동에 있는 심리치유센터 '와락'을 찾았다. 오는 30일 문을 여는 '와락'은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치유 공간.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와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실로 쓰던 공간을 리모델링했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한창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이날은 '와락' 내부 공간에 벽화를 그리기로 한 날. 2009년 파업 때부터 2년 넘게 알고 지낸 아이들이 장난치고 떠드는 소리로 센터 안은 왁자지껄했다.
'와락프로젝트'는 지난 3월부터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의 심리치료를 해온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동민씨의 아내 이정아씨는 "지난 여름부터 공간 알아보고, 사업허가증 내고 실무적인 절차들을 시작했으니까 오픈 하는 데 4~5개월 정도 걸렸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동안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있을까, 매일 매일 놀랄 정도로 많은 도움이 있었다"고 전했다. 정신과 전문의와 임상심리·상담심리 전문가, 아동전문가 등 전문가들과 '레몬트리 공작단' 등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기획단계에서부터 참여했다. 재정적으로는 고문피해자 모임인 '진실의 힘'에서 2000만 원을 기부하는 등 10월 17일 현재 총 2억 원에 가까운 시민 후원금이 모였다. 평택시와 고용지원센터에서도 각각 5000만 원을 지원했다. 방송인 김제동씨는 '와락'이 있는 건물 옥상에 야구장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장난감·책 후원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나는 꼼수다>의 힘도 컸다. 이 프로그램 출연진인 주진우 <시사 IN> 기자가 지난 23회 방송에서 '와락' 센터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이후 후원이 쇄도했다. 이씨는 "방송 나오고 하루 사이에 은행에서 통장정리를 했더니 통장 하나가 꽉 차서 다른 통장으로 바꿔야 할 정도로 후원금이 많이 들어왔다"면서 "은행직원도 놀랐고 우리도 놀랐다"고 말했다.
이날 아이들과 함께 벽화를 그린 이도연(38)씨, 아이들이 벽화 그리는 모습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은 주아무개(35)씨도 <나꼼수>를 통해 쌍용차 사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정아씨는 "파업했을 때 인터넷에 달린 악플을 보면서 정말 사람들한테 실망도 많이 하고 배신감도 많이 느꼈는데 요즘은 정반대"라면서 "정혜신 박사님, 레몬트리 공작단, 시민분들… 정말 감사하다는 말 이외에 더 멋진 표현이 있으면 말하고 싶다"고 웃어보였다.
파업 당시 셋째 가온이를 임신한 상태로 쌍용차 가족대책위 대표를 맡았던 이씨는 "얼마 전 가온이 두 돌이었는데 레몬트리 공작단 분들이 떡을 준비해주셨다"면서 "정말 감동 받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따뜻한 마음'이 늘어날수록 이정아씨는 '잘 해야겠다'는 부담감도 커진단다.
"정혜신 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밥만 신경 쓰라고. 좋은 재료 가지고 정성껏 밥을 지어서, 그릇도 그냥 그릇 아니고 예쁜 그릇에 담아서, '밥 참 맛있다, 내가 대접받고 있는 사람이구나' 느낄 수 있도록. 사실 해고자들이 파업 이후로 다들 대접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자존감이 떨어져 있어요. 이런 사람들에게 나도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거죠. 일종의 치유밥상이에요.
(웃음) 그런데 박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저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써야 하는 거예요. 하다못해 화장실에 휴지걸이까지. 지영(권지영 '와락' 센터 소장)이는 요즘 밤마다 쫓기는 꿈을 꾼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어젯밤에 악몽꿨어요."
"복직투쟁 하지 않는 조합원들도 편하게 쉴 수 있는 '거점' 됐으면"
'와락'의 기본적인 공간은 도서관처럼 꾸며진다. <시사IN> 책 기부 프로젝트를 통해 2500권의 책을 이미 기증받았다. '희망버스' 참가자들도 책을 기부해줬다. 도서관 한 켠은 카페처럼 만들었다. '맛있는 밥'을 지을 곳이다.
이정아씨는 바닥을 가리키며 "여기 밑에 열선을 깔아서 누워서 뒹굴 거리면서 책도 읽고 잠도 잘 수 있도록 했다"고 전했다. '와락'에서는 전문가들의 심리치료 프로그램과 함께 요가, 미술, 연극 등의 문화 프로그램도 계획되어 있다. 오는 30일 오후 2시에 열리는 오픈식에서는 아이들이 난타와 차임벨 공연을 선보인다.
이씨의 바람은 '와락'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쉼터가 되는 것이다. 이씨는 "예전에 가대위 활동 같이 했던 언니한테 오픈식 때 오라고 전화했더니 미안해서 못 오겠다고 하더라, 그 사람들은 그 짐을 계속 안고 가고 있는 것"이라면서 "따뜻한 밥 한 끼 지어주고 싶은데 여기까지 발걸음을 들여놓도록 하는 게 힘들다"고 안타까워했다.
'와락' 센터 소장 권지영(현 쌍용차 가족대책위 대표)씨는 "2009년 당시 정리해고자가 159명, 징계해고자가 70여 명이었는데 현재 복귀투쟁을 하고 있는 조합원은 20여 명밖에 안 된다"면서 "생계 때문에, 복귀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혹은 미안해서 모임이나 행사에 나타나지 않는 조합원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파업 당시에는 100여 명에 달했던 가족대책위 '엄마'들도 지금은 30여 명 밖에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다.
권씨는 "복직투쟁에는 함께하지 못하는 분들이라도 여기에서만큼은 편안하게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남편들이 평택 공장 정문을 투쟁 '거점'이라고 부르는데 여기는 또 다른 의미의 '거점'이 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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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밤마다 악몽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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