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프 트럭들의 모습 (자료 사진)
윤성효
덤프트럭 기사들의 애환은 <오마이뉴스>의 단골소재이고 다소 식상하기도 한 듯하다. 남편이 덤프 일을 하지만 난 기사를 유심히 보지 않았다. 내가 나쁜 아낙이라서가 아니라 남편이 힘들어하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구태여 재차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론 그간 투자한 돈이 있으니 나아질 거라고, 경기가 좋아질 거라고, 이번 고비만 넘기면 될 거라고 실낱같은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꽤 괜찮은 회사에서 생산직 근로자로 20년을 일한 남편은 늘 고지식하리만큼 성실했다. 홀어머니에 외아들, 가진 것도 없고 고졸 학력이었지만 착해서, 성실해서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이 다니던 탄탄하던 회사는 IMF 때 부도가 나고 법정관리와 몇 번의 인수를 거쳐 경영진이 여러 번 교체되면서 지속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됐고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다행히 젊었던 남편은 잘 버텨주고 있었고 우리는 그렇게 회사에 미래를 맡겼다. 그러나 2010년 2월 회사는 40대 중반이 되어가는 남편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았고 권고사직을 시켰다. 회사를 나오기 전 남편은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살이 10kg이나 빠져 종합검진을 받아야 했으니 그 고통을 보고 나서는 차라리 회사를 나오는 것이 낫다고,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도 만족한다며 힘들어 하는 남편을 달랬던 참으로 씩씩했던 나였다. 그게 오늘까지 나의 모습이었다.
20년 직장생활 후 시작한 '덤프 운전'... 힘들어진 생활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덤프기사의 아내 노릇을 못하겠다. 4000만 원이었다. 지난해 설날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회사는 남편에게 퇴직금, 위로금, 급여를 모두 합해 그 만큼의 돈을 주었다. 남편이 회사를 나오기 전 우리는 몇 번의 인수단계에서 퇴직금을 중간정산해 특근,
잔업이 없어 부족해진 생활비에 보태썼다.
회사로부터 받은 돈에 집 담보 대출을 5000만 원 받고 친정에서 1000만 원을 빌려 8500만 원짜리 볼보중고차를 사서 등록했다. 중고라도 비싼 외제 덤프차였지만, 오래 운전하려면 그 차가 낫다는 주변말에 빚을 얻어서 산 거였다. 이후 하루 10만 원 주는 기사를 고용해 한 달 동안 운전도 배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덤프트럭 운전하면 돈 잘번다'고 주변에서 부러워했고 그 때만 해도 회사를 잘 나왔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고사를 지내고 차에서 사진도 찍으며 잠깐 동안 행복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새벽3~4시에 출근한 남편은 저녁 8~9시, 늦으면 10시에도 집에 왔다. 덤프트럭 운전사는 첫 달 일한 월급을 다음달 말에 받거나 그 다음달 초에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시작하고도 최소 두 달 동안은 돈을 받을 수 없으니 돈이 나오기 전 생활비는 모두 내 몫이었다. 내가 150만 원 벌이 직장을 다녀 밥은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외제 중고차는 작은 접촉사고에도
100만 원씩 잡아먹었고, 한 번 수리를 하면 100~200만 부르는 게 값이었다. 차가 고장 났으니 돈 부치라는 남편 전화에 난 미칠 지경이었다. 그 사이 승용차도 팔았고, 패물도 팔았다. 두 달이 흐르고 돈이 들어오면서 숨이 쉬어졌지만
수리비는 여전히 200~300만 원씩 나왔고 대출금, 보험료, 세금에 생활은 궁핍했다.
18개월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느는 건 빚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