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의 무덤인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소재.
김종성
[장면 ②] 장남이 내뱉은 말에 민감해하는 아버지태종 14년 10월 26일(1414년 12월 8일), 세자 이제와 대군들이 부마(세자 입장에서는 매형) 이백강의 집에서 밤새 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세자가 큰누나인 정순공주에게 무심코 내뱉은 말이 다음 날 이방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큰형이 동생을 칭찬하는 말이구나' 하고 그냥 넘길 수도 있는 한마디를, 이방원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 말 속에서 위험한 기운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는 큰아이가 셋째 아이한테 경쟁심을 드러냈다고 판단했다. 사관들도 그런 이방원의 심리를 포착했다. 그래서 이방원의 표정과 발언을 '찰칵' 하고 사료 속에 담아냈다.
"임금께서 그 말을 듣고 불쾌해하면서 '세자는 동생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모임을 파했으면 (일찍) 돌아오는 것이 옳거늘, 어째서 이렇게 방종하게 놀았느냐!'라고 말했다."이방원이 화를 낸 것은 왕자들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자가 겉으로는 동생을 칭찬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동생을 견제하는 듯한 발언을 무심코 내뱉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그것이 취중진담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동생들과 너를 비교하지 마라'고 말한 것이다.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을 위해 왕위를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버지 이방원은 장남이 그렇게 큰 그릇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 사이를 예리하게 주시했던 것이다.
[장면 ③] 물러가는 장남의 체면을 세워주는 아버지첫째보다는 셋째가 더 유능했지만, 이방원은 어떻게든 장남을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남이 자질 부족을 드러낸 데에다가 툭하면 섹스 스캔들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큰아버지인 정종(당시 상왕)의 애첩마저 건드렸으니, 더 이상 큰아들을 지켜줄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첫째를 폐하고 셋째를 세자로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방원은 훗날을 염려했다. 큰아들의 체면을 세워주고 동생들이 혹시라도 큰형을 무시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런 그의 심리는, 그가 큰아들에게 '양보'의 뜻이 담긴 양녕대군이란 대군호(號)를 부여한 데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장남 이제가 세자에서 폐위된 날은 태종 18년 6월 3일(1418년 7월 6일)이고, 그가 양녕대군에 봉해진 날은 이틀 뒤인 6월 5일(7월 8일)이다. 양녕이란 타이틀은 첫째가 셋째에게 일부러 자리를 양보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타이틀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첫째와 셋째 간의 우애를 과시하는 동시에, 장남 본인에게는 '네가 동생에게 양보한 것이지, 결코 빼앗긴 게 아니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태종은 쫓겨나는 장남의 대군호 하나를 짓는 순간에도 아들들 간의 우애를 걱정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아들들 간에 혹시라도 골육상쟁이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