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뿌리깊은나무>의 한 장면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 왕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논란은 구닥다리가 된 듯 싶다. 그것이 정확한 고증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이른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논란보다는 역사에 대한 관심 유도와 활발한 토론을 유도하는 게 낫다는 견해가 우세해진 것도 같다.
일견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종 목적은 아니기에 이런 논의 자체에 함몰될 필요는 없다. 역사적 사실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골간은 있기 마련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경우 세종을 너무 치켜세우고 있다. 여기에서 치켜세움은 영웅화가 아니다. 너무 현대화되었고, 실존적 캐릭터로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리더심리를 실존적 개인의 관점으로 왕에 투영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간과했다.
바로 역사적 맥락, 나아가 진실이라는 부분이다. 예컨대 세종은 왕이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리더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이런 왕에 자신을 투영하지만 전제군주국가에서 왕을 단순히 오늘날의 리더로 착각하는 실존적 개인화는 분명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더구나 그는 철저한 성리학적 세계관을 준수해야 하는 봉건제 사회의 왕이었다.
왕은 착하고 신하는 악독하다?이런 드라마에서는 성리학적 질서와 유학적 질서가 뒤섞이는 상황에서 왕의 존재에 대한 낭만적 감수성이 지배한다. 전제국가의 수장이 한없이 인간적이기만 하다. 오히려 신하들이 악독한 존재로만 그려진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한다. 고리타분하다고 해도, 전제국의 왕은 백성을 사랑한다는 감정적 혹은 감성적인 존재 이전에 철저한 조선체제의 수호자여야 했다. 더구나 조선체제는 또 하나의 시스템 안에 있어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 존재한다. 그 왕은 중화질서의 제후에 머물렀다. 무엇보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계급적 질서는 당연한 것이었고, 노비와 같은 최하층 노예를 100% 인정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맥락에 맞다. 또한 그것이 진실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은 이러한 기본적 관점이 없어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난다. 즉 성군이라는 프레임은 어느새 스스로를 시스템 안에서 존재 기반을 붕괴시키는 사고를 과감하게 형상화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을 한글이라는 글자를 통해서 말이다. 세종이 구가하려는 세상은 성리학적 세계관이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정약용을 우리는 백성을 사랑하는 관리이자 사상가로 생각하지만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목민(牧民)이라는 글자의 목은 바로 양치기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도 성리학자였으며, 성리학적 세계관을 버렸다는 증거가 없다. 말년에 천주교 신앙을 믿었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있다. 그의 수많은 저서들은 성리학자의 경세치용의 일환이었다. 민본이나 민생은 성리학적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종의 봉토였고, 백성들은 그 왕토에 부속되어 있는 소유물이었다. 다만, 하늘의 도를 실현해야 할 왕이 자칫 맑은 하늘의 기운을 백성에게 실현하지 못하면 징벌을 내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형벌과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했다.
세종은 글을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지 밥으로 보지 않았다. 한글을 지은 것은 고려를 갈아치우고 조선을 세운 뒤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조치였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으로 나라의 국호가 바뀌었음에도 조선 전기에는 고려의 사회적 습속을 상당히 유지한다. 특별한 계기가 없음에도 조선 개국자들은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다. 정통성과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은 항상 존재했다. 더구나 왕권은 불안정했다. 각 세력들이 난립했고 세종이 정치를 하도록 태종이 피바람을 통해서라도 정적들을 정리해주었다. 비록 삼봉 정도전이 주살되었다고는 하나 신권은 어느 때보다 강해서 왕권을 위협했다.
세종은 한글을 과거 시험 글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세종은 똘복이와의 토론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글자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밥이 나오지는 않지만 더 많은 밥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글자는 밥과 밀접하다. 밥은 계층과 계급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백성들이 글자를 갖는다면 무너지는 것은 양반체제만이 아니라 왕권체제임을 감춘다. '밥 체제의 붕괴다. 귀족이나 양반 사대부가 존재하는 것은 왕권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밥을 두고 신권과 왕권은 적이 아니라 견제와 상호보완의 한 시스템에 있다. 마치 어느새 신권과 왕권이 분리되는 것처럼 그리는 것이 사극의 기본 포맷이 되어버렸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도 이러한 오류를 반복한다.
또한 똘복이의 아비를 죽게 만든 이유로 상왕 태종에게 대들고 문자를 만드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픽션 같은 이야기에 시대적·사상적 맥락이 탈색되는 것은 분명 우려스러운 일이다. 이는 한글이 세종이 만든 게 아니라 다른 무수한 존재들의 협업이라는 지적을 넘어서는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전제와 독재의 시스템이 한 명의 왕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지배체제의 구성인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왕은 수많은 왕족과 그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중차대한 지배계급의 상등급임을 잊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은 글자와는 관계없이 지혜가 충만한 존재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 도를 잘 닦은 자는 백성들을 총명하게 하려하지 않고, 장차 이를 어리석게 하려 했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에게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六十五.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 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 知此兩者亦稽式, 常知稽式, 是謂元德, 元 德深矣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백성이 불쌍하다고 보는 세종의 관념과는 다르다. 그리고 공자는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은 제일 위요,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요, 괴로움을 참으며 애써 배우는 사람은 그 다음이다. 그러나 애써 배우지도 않는다면, 이는 곧 최하의 사람 (孔子曰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이라고 했다. 또 번지가 곡식을 심는 법에 관하여 배우기를 원하자 공자는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라고 했다. 다시 번지가 채소 가꾸는 것에 관하여 배우기를 청하자, "나는 채소 가꾸는 늙은이만 못하다"라고 했다.(樊遲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吾不如老圃.) 이는 지혜의 본질성은 학문이나 글자 이전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보자. 조선시대에 사람들이 글자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과거시험이다. 애초에 세종은 한글을 과거 시험의 글자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과거 시험으로 한글을 사용했다면 조선민중은 누구나 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을 것이고, 조선은 붕괴되고 근현대 사회는 이미 그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안 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종의 계급적 혹은 계층적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다.
글자는 밥줄이다. 우리가 영어에 올인하고 있는 것은 밥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서 영어점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세종은 글자를 밥줄이 아니라 전달의 도구로 생각했다. 결국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밥그릇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계급, 계층적 전쟁을 사대부만 적으로 만들고 세종을 휴머니즘 리더십으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민중의 소리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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