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숙
예향천리길은 순창군에서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길을 기획하면서 생겨난 길이라 아직 생소하다. 하지만 섬진강과 벌통산이 어우러진 이 길은 보여주는 길이 아닌 이 길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담겨 있어 정감이 가는 길일뿐이다.
어릴 적 소꿉친구와 도란도란 걸으며 솨악솨악 거리는 바람 소리처럼 그냥 걸어가는 길이다. 먼지 뒤집어쓰고 콩 타작하다가 반가운 친구가 나를 보러왔다는 문자를 보는 느낌, 몸빼바지 입은 채로 헐레벌떡 뛰어나가 친구 손 꼭 잡고 구경시켜 주고픈 길이다. 오십 줄에 들어서는 친구의 마음을 읽어주고 웃어 주며 토닥거리며 가는 길가에 실한 무 쑤욱 뽑아 쓱쓱 바지에 닦아 서로 베어 물며 키드득 웃어주고픈 길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길들이 태어나고 사라지고 다시 이름을 바꾸지만 순창 사는 사람들에겐 그 어떤 명품 길보다 더 소중한 길이다. 강천산의 맨발로 걸어가는 길이 사람 맛 나는 장터같다면 섬진강을 끼고 도는 이 마실길은 첫 마음 첫사랑 같은 아스라함이 있다.
순창 적성 구남 어은정에서 마실길은 시작된다. 어은정이란 조선왕조 중기 문신이며 학자였던 양사형(揚士衡)이 자신의 호인 어은(漁隱)을 따서 붙인 정자이다. 흘러가는 섬진강을 수놓는 백일홍이 필 때의 풍경은 보는 사람마저 황홀하게 한다고 한다.
어은정을 돌아서면 보이는 내월 취입보는 농사꾼들의 속내를 알아주려는 듯 항상 그 자리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내월 취입보를 지나 숲 속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찾았다. 어은정에서부터 함께 따라온 백구가 안 보이기에 어디 갔나 찾았더니 이미 숲 속 계단 위에서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옛사랑의 추억을 휘감아보듯 나와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앞서 걸어가기 시작하는데 예향천리길 문화유산 해설사 같다.
숲 속 길은 나무로 만들어진 데코길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던 길이어선지 수많은 나무와 덩굴들, 솔잎이 낙엽이 되어 길을 덮고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숲길에서 바라보는 섬진강은 친근한 엄마 얼굴 같다가도 들깨향기 온몸에 배인 보고픈 사람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 강에는 물이 흘러간 자국 그대로 바위가 맨살을 드러내고 옹기종기 어우러져 있는 풀들이 단풍나무보다도 더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여름 섬진강댐 방류로 전봇대의 허리만큼이나 차올랐던 물로 농사꾼의 매실나무들은 죽어 있고 흙길은 자갈돌길로 변해 있었다. 길마다 야생 갓 들이 갈대와 어우러져 있는데 왜 이리 먹먹한지…. 농민들 속 터지는 소리 하늘이 알아주려나 애꿎은 하늘만 욕하다 돌아섰을 아짐들의 마음이 전해진다.
길이 끝날 무렵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어진 사람들이 되려 화 당하는 것을 보고 자연 속에 묻혀 아우 돈(墩)과 함께 세상을 잊고 살았다는 양배가 지은 구암정이 쉼터역할을 하려는 듯 앉아 있다. 바위에도 물이 흘러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쉬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하수와 벤치가 놓여 있어 학문을 닦아 그 지식이 높았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던 양배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양배는 아우와 함께 이곳에서 평생 고기를 낚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지금도 적성강 상류 만수탄에는 형제가 고기를 낚던 바위가 남아 있어 배암·돈암이라 부르거나 합쳐서 형제암이라 부르고 있다.
"사막은 아름다워.사막이 아름다운 건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이제 섬진강과 장구목의 시원한 강바람을 가슴으로 들이마시면서 걷는 길이다. 수달이 나올 정도로 생태적 가치가 높은 강변에는 기암절벽의 빼어난 풍광은 없다. 직선의 미학이 아닌 느림의 미학, 곡선의 미학이 사로잡는다. 농사꾼들이 일하고 돌아오는 노을길에 삽 씻고 얼굴 씻고 허허 오늘 하루도 잘 지냈구나 하고 다리 두들겨 주는 강이다. 그래서 더욱 좋은 강이다. 아름다운 세월이 흘러가는 곳이다.
구미다리를 건너니 강경마을로 가는 입구에 마실길 주차장 표지판이 나온다. 작고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는데 윗부분에 놓여 있는 게 하 수상하다 느꼈는데 여름에 물이 차올라 그랬나 보다며 고개가 끄덕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