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에서 버림받은 청년

[인터뷰] 걸프전에도 참전했지만 추방당한 입양인 한호규씨

등록 2011.12.03 14:51수정 2011.12.0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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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호규씨(좌측). 기자가 그의 입양서류를 확인하고 있다
한호규씨(좌측). 기자가 그의 입양서류를 확인하고 있다한혜림

한호규(미국명 몬트 하인즈)씨는 8살 때인 1978년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는 미국이 이라크와 벌인 걸프전에도 1993년부터 1996년까지 3년간 미군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돌연 2년 전인 2009년, 그는 미국정부에 의해서 '미국시민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입양 보내진 지 31년 만에 한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중시한다는 미국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모든 인간은 생명, 자유, 행복추구와 같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하느님에게서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미국 화폐에는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라고 적혀있다. 지금까지도 유럽과는 달리, 미국으로 입양 간 입양인들에게 자동적으로 미국적을 주지 않는 미국정부의 이러한 비인간적인 조치는 잘못된 것이고, 인류가 지향해서는 안 될 인종차별정책이다.

기자는 전 걸프전 미군참전용사이지만 지금은 한국으로 추방된 한국계 미국입양인 한호규씨를 지난 11월 26일 뿌리의집 추수감사절 파티에서 만났다. 아래는 뿌리의집에서 한호규씨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한호규씨는 1970년 2월 20일 한국에서 태어났다. 7살 때인 1977년 그는 가족형편상 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할머니 댁에서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기를 돌보기로 한 삼촌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집에서 나와 길을 잃었다. 미군에 의해 발견된 그는 송파구 경찰서에 미아로 의뢰 되었다. '무적(無籍)아동'으로 분류는 된 그는 1977년 10월 24일 충현영아원에 보내졌다.

영아원 입소 다음날인 10월 25일, 충현영아원은 홀트아동복지회에 그의 해외입양을 의뢰했다. 다음달인 11월 23일, 홀트아동복지회는 한씨의 고아호적을 만들었다. 다음해인 1978년 9월 22일, 미국 아이오와주 호먼부부에게로 해외입양이 결정된 후 그는 같은 해 11월 17일 미국에 도착, 미국인의 가족이 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호먼부부가 한씨를 적절하게 양육하는 게 불가능하고 입양 부모로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한씨는 1979년 12월까지 호먼부부와 살았다. 1980년 1월 2일부터 10일까지 한씨는 임시 위탁가정인 힐스 가정으로 보내졌다.


타의로 온 미국생활이라 그런지 어린 한씨는 제대로 미국생활에 적응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나는 당시 정신적, 육체적, 성적학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어떤 학대를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있나?"라고 물었다.

"호먼씨는 내가 미국 생활에 적응을 못하거나, 집안일을 안 하거나, 말(영어)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나를 어두운 옷장 속에 넣고 밖에서 열쇠를 잠가 버렸다. 그래도 그것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중에는 아예 먹을 걸 안 주었다. 또 어떨 때는 나뭇가지와 허리띠로 마구 내 몸을 때렸다. 그 시절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너무 슬프고, 서럽고 말 못할 그리움 같은 것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2008년 7월 24일 미사회보장국에서 발부한 서류를 보면 한씨가 22살이던 1992년 12월 16일, ‘미국시민’인 한씨에게 사회보장번호가 발급되었다고 적혀있다.
2008년 7월 24일 미사회보장국에서 발부한 서류를 보면 한씨가 22살이던 1992년 12월 16일, ‘미국시민’인 한씨에게 사회보장번호가 발급되었다고 적혀있다. 한호규
힐스 가정에서 8일 머무른 후 한씨는 입양을 희망하는 가정이 나타날 때까지 위탁보호시설에서 지냈다. 그 후 위탁보호시설에서 약 1년 반이 지난 1981년 7월 15일, 내브라스카주에 있는 하인즈 가정으로 마침내 한씨의 공식 입양이 결정되었다. 미국에 입양 보내진 지 2년 8개월 만에 마침내 한씨는 자기를 입양하고자하는 '적절한' 부부집에 처음으로 보내진 것이다.

어렵사리 만난 한씨와 미국 입양부모. 그러나 입양부모 간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자기를 입양함으로써 침체된 결혼생활에 입양부모가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한 것 같았다고 한씨는 느꼈다. 그러나 결국 1987년, 한호규가 17살 때, 입양부모의 결혼생활은 파경에 이르렀다.

나중에 한씨가 알았지만 그의 입양 아버지는 양성애자였다. 한씨는 자라면서 입양아버지에게 수시로 폭력을 당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성적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한 번은 한씨의 학교 급우(남자아이)를 입양 아버지가 성폭행하다가 결국 입양엄마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한씨 입양부모는 이혼하게 됐다고 한씨는 주장했다.

그 후 한씨는 잠시 이혼한 입양엄마와 함께 살았지만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청소년위탁시설로 들어가서 1987년부터 1990년까지 3년간을 살았다. 결국 1978년 미국에 입양 보내 진 후 그가 미국입양부모와 제대로 살아 본 기간은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약 6년에 불과했다.

성인이 된 후 청소년위탁시설을 나오고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한씨는 동네 커뮤니티 칼리지를 다닌다. 졸업 후 1993년 군대에 지원하여 걸프전에 참전한다. 군대에서 그는 이라크주둔 최전방 물자수송을 담당했다. 걸프전을 겪고 난 후인 1996년 그는 군대가 싫어져서 직업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전역했다.

전역 후인 1996년부터 1998년까지 2년 동안 공항경비원을 거치고 1998년부터 한씨는 트럭운전사로 취업한다. 그러던 2001년 2월 27일, 트럭운전을 한 지 약 3년째가 되던 날, 그는 한 친구의 부탁으로 컨테이너 박스를 운반하던 중 택사스주 검문소에서 검문을 당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부탁한 컨테이너 박스를 경비원이 열어보니 그 안에 마약이 있었다. 즉시 마약수송범으로 한씨는 현장에서 체포된다. 법정에서 그는 컨테이너 박스가 봉인되어 있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유죄판결을 받은 한씨는 2005년 12월 15일까지 약 4년 간 수형생활을 한다.

수형생활 도중에 한씨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미국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8살에 미국에 입양 보내 진 후 여러 시설과 위탁부모, 입양부모를 전전하다가 걸프전쟁에서 3년간이나 직업군인으로 근무하다가 전역한 자신이 미국시민이 아니라고 통보받은 한씨는 이 사실을 믿을 수 가 없었다.

유럽과는 달리 미국으로 입양 간 입양인들은 미국국적이 자동으로 취득되지 않는다. 입양부모가 입양아를 위해 미국국적 취득절차를 밟아주어야 하지만 안 하거나 못 해주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 20~30년 산 한국계 미국입양인들 중에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입양 온 나라인 한국으로 강제 추방되는 한국계 미국입양인들이 있다.
(참고 - 미국 입양인이 '한국 고시원'에 사는 이유)

무작정 미국에서 20~30년 만에 한국으로 강제 추방된 이들 한국계 미국 입양인들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한국에서 재적응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들은 미국정부로부터 한국으로 추방되고 나서 이태원 등에서 노숙을 하거나, 운이 좋으면 몇몇 종교인의 도움으로 고시원 등에 머물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한다. 이렇게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한국계 입양인 중 노숙생활을 하다가 가까스로 주위 한국분들의 도움으로 한국국적 회복신청을 통해서 한국국적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이제 이들에게는 군입대영장이 나온다.

물론 병역의무는 '신성'하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20~30년 간 살았던 한국계 미국입양인은 외모만 한국인이지 한국말도 못하고 의식구조도 한국인이 아니다. 이들에게 이제 한국국적을 취득했으니 신성한 국방의무를 수행하라고 입대영장을 보내는 것은 뭔가 잘 못 된 게 아닐까?

하여간 한씨를 처음 입양하려 했던 호먼 가정을 비롯해, 위탁가정이었던 힐스 가정과 다시 입양한 하인스 가정 모두 한씨가 미국시민권을 받게 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태껏 자신이 미국시민인 줄 알았고 심지어 미국시민으로서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걸프전에 참전했던 한씨에게는 이 사실이 청천벽력과 같았다. 2008년 7월 24일 미사회보장국에서 발부한 서류를 보면 한씨가 22살이던 1992년 12월 16일, '미국시민'인 한씨에게 사회보장번호가 발급되었다고 적혀있다.

한편 미국 국토안보부는 한씨 출옥을 약 5개월 남겨둔 2005년 7월 28일, 그에 대한 보호관찰명령을 내렸다. 이 말은 그가 석방 된 후에도 6개월마다 이민국에 와서 신고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9.11 후 강화된 미 국토안보부의 조치였던 것이다.

2005년 12월 15일 한씨는 석방되고 6개월 마다 이민국에 출두해서 신고의무를 했다. 그러던 중, 2008년 8월 20일 그의 입양남동생이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뜻하지 않은 입양형제의 자살로 장례식 등 경황이 없었던 한씨는 이민국에 출두해 신고를 하지 못한다.

결국 신고를 왜 안하느냐고 전화 온 이민국직원에게 그는 "지금 동생이 죽었는데 신고가 문제야. 맘대로 해!"라고 소리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민국 직원은 결국 신고의무를 누락한 죄로 한씨를 다시 체포한다. 그의 또 다른 입양 남동생인 존 하인스는 이민법재판에서 한씨의 강체추방을 막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했으나, 결국 미국 이민법정의 판사는 한씨의 강제추방을 결정한다.

 추수감사절 파티 중인 해외입양인. (가운데 힌옷 입은 사람이 한호규씨)
추수감사절 파티 중인 해외입양인. (가운데 힌옷 입은 사람이 한호규씨)뿌리의집

강제추방 되기 전, 2009년 10월 25일부터 11월 3일까지 한씨는 다시 구금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입양 보내진 지 31년만인, 2009년 11월 4일, 운전면허증과 미국에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모든 서류를 비롯해, 재판관련 서류까지 모두 압수당찬 채로 한씨는 미국 국토안보부 직원들에 의해 한국 인천공항으로 인도되었다.

한호규, 그는 생애에 두 번, 두 국가에 의해 버림받았다. 한 번은 자기가 태어난 한국에서, 또 한 번은 자기가 31년간 성장한 미국에서.

2009년 11월 29일 한씨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서 자기를 낳아준 생모를 만났다. 그러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의식구조가 너무 다른 생모와 그 후 그는 더 이상 만나지 않았고 이제 생모의 연락처마저 분실했다.

2009년 11월 한국에 온 이래 그는 한 종교단체의 도움으로 한국국적을 복원 신청해 받았다. 이제 법적으로 그는 다시 한국인이지만 한씨는 한국말을 못한다. 2009년 한국에 온 이래 그는 자동차공장 등 여러 곳에서 잡일을 닥치는 데로 하며 살았다.

기자는 한호규씨에게 물었다.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가 해외입양인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고.

"두 정부는 해외입양정책을 바꿔야 한다. 두 정부는 철저하게 미국 입양부모가 될 사람의 아동학대, 범죄경력, 정신병력 등을 미리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내 경우처럼 입양부모가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정부는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서는 안 되고, 미국정부는 한국에서 입양아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 같이 불행한 입양인이 다시없기를 바란다."

한호규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의 마음은 너무 씁쓸했다. 해외입양인 문제를 인도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정부는 물론이고 미국정부도 더 이상 인권이나, 생명존중,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권을 존중한다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에게 묻는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위선(American Democracy is American Hypocrisy?)"이 아니냐고.
#한호규 #입양 #미국의 모순 #김성수 #아동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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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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