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벌 궁리만 하면 가족이 망가집니다

[똑똑한 생활경제⑫] 맞벌이의 딜레마에 빠진 부부

등록 2011.12.05 16:33수정 2011.12.1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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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초반의 노지숙씨(가명, 36세, 기혼)가 요즘 우울한 이유는 생각할수록 미련한(?) 자신 때문이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만 해도 어떻게든 최대한 직장에 다녀보려고 했다. 아직 집 대출금 상환이 꽤 버거운 수준이라 맞벌이를 하지 않고는 힘든 상황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아이를 낳자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몸이 아프신 시어머니도, 시골에서 농사 지으시는 친정어머니도 아이를 봐줄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둘째를 출산하고 나서는 두 아이를 잘 키우는 게 급선무라 생각하고 전업주부 생활을 시작했다.

이러한 옳은(?) 결정과는 별개로 갈수록 늘어나는 '마이너스'에 지숙씨는 없던 두통까지 생겼다. 저축은 커녕 빚 갚아 나가기도 버거운 살림에 두 아이가 학교라도 다니기 시작할 땐 어쩌나 싶어 아찔하기까지 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어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친구들은 지금 진급까지 해 연봉이 꽤 많이 올랐다. 남편과 돈 문제를 의논할라치면 "대체 번 돈이 다 어디로 가는거냐"고 이야기하는데, 마치 자신을 살림도 못하는 여자로 타박하는 것 같아 괜히 서러울 때가 많다.

'내가 너무 성급한 결정을 내렸나' 싶은 마음에 지숙씨는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낮 시간동안 할 만한 일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근처 세무사 사무실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구한다기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채용이 결정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출근한 첫날부터 엄청나게 쏟아지는 업무에 점심 식사 할 시간마저 부족한 상황이 버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둘째가 미열이 있다며 어린이집에서 계속 연락이 오고, 어린이집 끝나는 시간에 맞춰 퇴근하기로 했지만 일은 끝없이 계속 쏟아지고.... 결국 지숙씨는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다는 판단에 출근 첫날 사표를 쓰고 집에서 펑펑 울었다.

"제가 이리도 무능한지 몰랐어요. 이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돈이 더 필요한데 어쩌면 좋죠?"

돈이 더 필요한데 어쩌면 좋을까요

물론 가장 혼자 버는 것보다 부부가 함께 벌면 합산 소득액이 굉장히 높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더 버는 것만 보고 결정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 간과되는 실정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딱히 놀이수업, 영어프로그램 등 어떤 목적성 프로그램으로만 이야기될 수 없는 정말 무수한 '돌봄'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보육을 어린이집으로, 가사일을 가사도우미로, 가정에서의 '돌봄 역할'이 자꾸 돈 주면 대체 가능한 일인 양 회자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돈 더 버느라 지친 아버지, 어머니에게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집이 아니라 그저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눈 마주치고 몸으로 부대껴야 하는 '가족'의 온기와 관심이다.

가사일은 말끔하게 처리돼 있는 '결과적 상태'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온 가족의 일상 유지와 더불어, 노동의 필요성과 보람을 배우는 일이기 때문에 전 구성원의 분담구조가 중요하다. 누구든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려면 응당 스스로 기여해야할 바가 있다. 가족 뿐만이 아니라 회사나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의 어른은 이런 재생산을 위한 가사 노동의 '배분'과 '검수' 역할을 담당하면서 가족 구성원들을 이끌어 가야 한다.


그렇지만 가사일이란 게 해놔도 표시가 잘 안 나고, 그렇기에 매일 계속되어야 하며, 인생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되풀이되기에 귀찮기도 하다. 누가 좀 알아서 해줬으면 좋을 이 일을 지금까지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저 묵묵히 담당해온 게 사실이다. 그런 어머니의 존재는 대단히 감사하지만 또한 응당 어머니의 역할이겠거니 하는 암묵적 묵인이 있어왔다. 여기에 어머니들도 큰 반발을 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가사노동을 당연히 해온 사람이라면 일생을 살면서 자기 재생산을 위한 기본 노동이 몸에 배어있다. 그러나 가사노동이란 게 누군가 내 대신 처리해주는 허드렛일 같은 거라면, 돈만 있으면 이 귀찮은 일 남에게 시켜도 되는 상황이 연출된다. 누가 누군가를 위해 돌보는 일이 돈으로 해결이 가능하면,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혜택'만 보고 '희생'이나 '기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결혼했는 줄 아느냐"는 항변은 뭔가 '기여'의 의무보다 '혜택'의 권리가 앞서는 느낌이다.

상대적으로 돈이 없는 사람은 직접 이런 귀찮은(?) 일들을 한다. 돈은 누구나 응당 하고 살아야 하는 가사일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렇게 돈으로 해결하기 시작하면 가족들은 더불어 살고 서로의 지속가능한 삶에 음으로 양으로 기여해야 하는 어떤 정체성도 찾기 어려워진다. 대체 우리는 왜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일까?

돌봄, 비생산적 노동이 되다

가사노동과 '돌봄'이 갖는 본래적 가치는 '희생'이나 '돌봄'같은 아름다운 가치로 포장되어 그저 돈 벌지 않는 '비생산적 노동'으로 인식돼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다. 그저 돈 버는 일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음에 따라 가정주부 혹은 전업주부들은 더 이상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소모적인 가사노동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어려워졌다. 같은 가사일이라도 돈 버는 가사일을 하려면 내 가족 돌봄이 아닌 월급 받고 남의 가족을 돌보는 일을 찾아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남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내 아이는 남에게 맡기는 상황 속에서 혈육 간의 정이 담긴 정성이란 가치는 증발된다.

심지어 가사일로 돈 버는 사람마저 '파워블로거'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면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생산성이 없은 사람'이며 '무가치한 잉여인간'쯤으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당연히 생산성이 없는 노약자나 어린이는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분류되어 부양대상화 되었고, 부양비용만을 따지며 길어진 평균수명에 눈흘기는 잔인한 세대로 전락하고 있다.

결국 '더 벌기'에만 혈안이 되면 더 큰 사회적 비용을 만들어낸다. 엄마의 역할을 각종 서비스직들의 돈벌이로 치환시켜 서로 목적도 불분명한 '더 벌기 레이스'를 만들어낸다. 내가 더 벌기 위해 놔야 하는 일들은 다른 사람의 '돈벌이 수단'이 된다. 내 자식이기에 자연스레 들어가는 '진심'을 서비스직 보육사에게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돌봄이 사회적 서비스화되면서 '비용절감' 차원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회적 문제 또한 더 이상 간과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시기에 '돈 벌이'에 내몰려야 하는 엄마들은 계속 딜레마에 빠져있다. 돈 벌려면 감수해야 하는 아이들의 희생이 눈물겹고, 그러자고 집에 남아 전업주부로 아이만 키우자니 늘어나는 재정적자와 스스로 사회에서 도태되는 느낌으로 인한 불안감은 치유될 길이 막막하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기까지 특정 기간 만큼은 가정을 일구어 나가기 위해 누군가 벌면 누군가는 잘 관리하는 것으로 역할분담이 이루어지는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가족 이루기가 정녕 어려운 것일까.
#가사노동 #맞벌이 #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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