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 수애는 실력 있는 출판사 팀장으로 일적인 성공을 이룬 인물을 연기했다. 하지만 모든 출판노동자의 삶이 이렇게 '샤방샤방'하지는 않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이선필
나는 감히, '마감'이라는 것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것은 얄미운 짓만 골라 하는 애인처럼,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양미간에 깊은 골을 만든 채로, 팔짱을 단단히 끼고서. 그렇다고 그와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가 나를 살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력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회주의자들이 예언한 바대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세상이 오리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30여 년,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바, 추측은 이미 확신에 가까워진 지 오래다. 신자유주의라는 놈은 급기야 진보의 탈을 바꿔 쓰고 세계를 누빌 기세여서,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찌됐건 기를 쓰고 뭐든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죽을 때까지 말이다.
단타 신호로 모든 것이 자동화 된 디지털 시대에서도 편집노동은 아직도 아날로그적 방식에 머물러 있다. 활자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등의 섬세하고도 강도 높은 정신노동은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충혈된 눈과, 간헐적으로 쥐어뜯어 산발이 된 머리. 벌써 몇 잔째인지도 잊어버린, 체내 고용량으로 축적된 카페인 때문에 판단력은 이미 흐려진 지 오래다. 혹자가 걱정스러운 제스처로 편집자의 어깨를 살포시 흔들기라도 한다면, 화들짝 놀라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되려 급히 사과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아…, 죄송. 일 보세요."원고를 받으면 교정교열부터 시작해 비문을 수정하고, 구두점을 통일하는 등의 과정들이 계속 반복된다. 본 원고를 보고, 재차 보고, 삼차 보고 하다 보면 내가 원고를 교정하는 건지, 원고가 나를 교정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불안이란 우릴 변하게 만드는 긍정의 힘을 품고 있다'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평과는 무관하게 불안은 그저 모든 일들을 멈추게 만든다.
'에라 모르겠다'와 같은 심정으로 편집자는 불현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컴퓨터 전원을 꺼 버리고 쇼파에 누워버릴 수 있다. 얌전하게 이불을 덮은 편집자는 마감 날 아침까지 스무 시간 서른 시간이고 푹, 정신줄을 놓아버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대체로 곧 뻑뻑한 눈을 굴리며 다시 일어난다. 마치 제3의 인격이 육체를 통제하는 기분으로 다시 책상에 앉는 것이다.
나 지금 뭐 하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