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숙
연합뉴스
영국의 잉글버트 험퍼딩크가 불러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Release me>다. 여인은 이 노래를 세 번이나 연속으로 틀어줄 것을 부탁했고 디스크자키도 선선히 그에 따랐다. 뭔가 내밀한 사연을 가진 듯, 여인은 칵테일과 노래를 음미하다가 오후 9시가 좀 지나 나이트클럽에서 일어섰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인 오후 11시경, 새로 완공한 강변도로를 달리던 코로나 승용차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부근을 지날 즈음 느닷없이 두 발의 총성이 울리더니 코로나가 멈춰 섰다. 운전자가 다리에 피를 흘린 채 절룩거리면서 나와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급히 병원으로 갈 것을 부탁했다.
코로나 승용차 안에서는 현장에서 숨을 거둔 여인이 발견됐다. 연초록 원피스에 분홍색 머플러… 호텔 클럽에서 <Release me>를 신청해 듣던 바로 그 여인, 정인숙이었다. 당시 정인숙 피살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두고두고 의문과 소문을 만들어낸 박정희 정권 시기 최대의 섹스 스캔들이었다.
검찰의 지휘를 받아 일 주일 남짓 수사한 경찰은 "정인숙이 요정에 나가면서 많은 남자들과 사귀었고, 심지어 아들까지 낳아 기르는 등 사생활이 좋지 않아 운전을 하던 오빠 정종욱이 나무랐으나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반발하자 정종욱이 권총으로 살해했다"고 결과를 발표했다.
그녀의 오빠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 해서 거짓 자백했다"그러나 정인숙을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년 감옥살이를 한 뒤 1989년 출소한 그녀의 오빠 정종욱은 끈질기게 이 수사 결과를 전면 부인했다.
"나는 범인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 동생을 죽일 수는 없다. 아버지가,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우리의 뒤를 봐준다고 했다면서 회유하기에 거짓 자백을 했을 뿐이다. 강변도로의 집 앞에 있던 괴한들이 총을 쏘았다. 내가 억울하지 않다면 수감생활까지 다 하고 나와서 "내가 쏘지 않았다"고 하겠느냐. 마지막으로 재심 청구를 해서 반드시 누명을 벗겠다." 꼭 정종욱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당시 검경의 수사 결과를 보면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종욱의 옷소매에서 탄흔이 나왔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결과를 증거로 유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후에 한 방송사의 특집 프로그램에서 실험해 보니 본인이 총을 직접 쏘지 않았어도 자동차 안에 총탄이 발사됐으면 옷에 탄흔은 묻어났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기보다 서둘러 종결짓고 덮으려 한 수사였다.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가까이 된 1970년 5월 13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 1969년 9월, 박정희는 그의 세 번째 연임 길을 터놓기 위해 공화당 의원만으로 3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그 후 국회는 마비상태가 장기화되다가 이듬해 5월 초 신민당 총재 유진산의 타협노선 때문에 다시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