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선영 장편소설 이 소설은 10년을 노숙자로 살았던 이지훈이 말소된 주민등록을 살리려 할 때 누군가 “살인자, 이대형이다. 잡아!”라는 것으로 문을 연다.
청어람
2011년, 한국 추리소설은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다. 예년에 비해 많은 작품들이 출간되는 탓이리라. 1986년 일본에서는 신본격이라는 이름으로 추리소설의 재 부흥기가 도래했듯 한국에도 그런 날이 곧 펼쳐질 것이라 믿는다. / '오직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라던 니체의 말을 예로 든다면 거창하겠지만 글이 활자와 지면으로 옮겨진 뒤는 독자의 해석만이 남는 것 같다.-'작가 후기' 몇 토막
작가 손선영 장편소설 <죽어야 사는 남자>는 물질자본주의가 할퀴고 있는 우리 사회, 그런 사회에서 버림받은 가난한 사람들의 속내를 쓰다듬고 있다. '이 남자가 사는 법', '이 여자가 사는 법', '그 남자가 사는 법', '사는 법' 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 곳곳에서 물질이 사람을 제멋대로 짓밟는 모질고도 지독한 우리 사회에 '사는 법'이란 잣대로 맞서고 있다.
손선영은 "얼마 전 신문 사회면에 지문날인제도에 대한 거부와 함께 지문을 통해 범죄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억울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대한민국은 개인 ID관리체계인 주민등록번호가 해킹되었을 때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한 국가"라며 "대체할 수 없거나 가장 효율적인 관리체계라는 정부의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과연 그것이 국가적으로 필요한 것일까"라고 물음표를 던진다.
그는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문과 주민등록제도를 통합해 국민을 관리하는 국가"라며 "그것이 통제의 수단인지, 아니라면 관리의 수단인지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악용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상상력에서 출발했다"고 되짚었다.
누구나 '죽어야 사는 남자' 이지훈이 될 수 있다 2011년 10월 25일 아침. 이지훈의 그림자는 주민 센터를 향하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태양이 등 뒤에서 그를 부추겼다. 3주 전처럼 긴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 탓에 심장이 뛰었다. 새시 문을 밀고 주민 센터에 들어갔다. 동시에 그를 반겨주었던 3주 전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업무준비가 되지 않은 듯 공무원들은 분주해 보였다. / 너무 일찍 왔나. 맞은편 벽에 있는 시계가 8시 56분을 가리켰다. 그래도 4분 정도야."저 주민등록증 찾으러 왔는데요.""아, 네." 대답을 얼버무린 그녀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러나 새로이 발급받을 주민등록증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잠깐 숙인 그녀가 얼른 뒤에 있는 시계를 향했다. 손에 쥔 볼펜을 책상 위 고무판에서 빠르게 두드려 댔다. 그러다 볼펜을 놓쳤다. 잠깐이지만 그녀의 손이 파리하게 떨렸다. -17쪽 <죽어야 사는 남자>는 한 가지 주제 아래 4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남자가 사는 법'은 신(scene)과 신, 시간과 시간이 사라지는 엇갈린 이야기다. '이 여자가 사는 법'은 남편이 이 세상을 떠나자 10년에 걸친 기억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한 여자와 그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는 정신과 의사를 다루고 있다.
'그 남자가 사는 법'은 '닥치고 추격'을 그린 하드보일드다. 하드보일드란 1920년대부터 미국문학에 나타난 창작태도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차갑고 슬픈 일을 그 어떤 감상에만 빠지지 않고 짤막한 글로 드러내는 글쓰기다. '사는 법'에서는 이 이야기가 대한민국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손선영은 "굳이 어려운 경제개념을 떠올리지 않아도 자본주의의 폐해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수동화되는 인간. 경제사회에서 주체가 아니라 객체화되어 가는 모습 등이 그것"이라며 "무엇보다 자본이 우선시되는 사회상을 보며 누구나 한 번쯤은 우리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게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가짜와 진짜, 거짓과 진실 그 첫 단추와 마지막 단추는?모든 상황은 가짜였다. 백용준이 쫓았던 이대형은 가짜였다. 버젓이 사업가로 행세하던 이지훈도 가짜였다. 가짜, 이 뒤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송호근이 있었고 똥개가 있었으며 양 상사가 있었다. 이것은 중대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장대한을 살해한 살인범을 체포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가짜와 진짜, 거짓과 진실. 첫 단추는 어디이고 마지막 단추는 어디일까.-374쪽이 소설은 10년을 노숙자로 살았던 이지훈이 말소된 주민등록을 살리려 할 때 누군가 "살인자, 이대형이다. 잡아!"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문을 연다. 이지훈은 나는 살인자도, 그렇다고 이대형도 아니라고 마구 소리 지르고 싶지만 한순간에 쫓기는 살인자가 된다. 이지훈은 쫓기면서도 노숙자로 살았던 기억이 흐리고 무뎌져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도 혼란스럽다.
한 가지 또렷한 것은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형사는 거머리처럼 지독하게 이지훈을 추격한다. 이지훈은 달리고 부수고 택시에 쫓기며 형사를 따돌리지만 언제 형사가 눈앞에 나타나 수갑을 들이밀지 알 수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을 살인자로 내몬 누군가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졸지에 이름까지 잃어버린 이지훈은 그를 살인자로 내몬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그를 쫓는 사람들은 하나둘 늘어나기만 한다. 이지훈이 아닌 살인자 이대형을 쫓는 형사와 킬러 똥개, 장돌뱅이 이구아나에 흥신소 양 상사까지. 이지훈은 어떻게 살인자란 누명을 벗고 제 이름을 찾을 수 있을까.
'물질'이 사람을 쓰레기로 몰고 가는 시대에 겨누는 글칼그게 말이야, 자꾸 걸리네. 죽은 이지훈이. 그 사람이 살인자 이대형으로 변했는데 실제 이대형은 산청 출신이었다는 것 빼고 알아낸 게 없어서. 이지훈이 넋을 달래는 게 또 이대형을 찾아내는 것 아닌가 싶어서. 그래야 이대형의 넋도 달래질 거고. 정 팀장님, 이번 건, 승인해 주실 거죠?-429쪽손선영 장편소설 <죽어야 사는 남자>는 IMF를 지나 고물가, 고유가, 취업대란 등으로 노숙자를 수없이 만든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또 하나 살인이다. 이 소설은 '물질'만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우리 사회를 늪으로 몰고 가는 21세기, 가난한 사람들은 '돈' 보다 훨씬 못한 사람쓰레기로 내몰리는 우리 시대 정수리에 날카로운 글칼을 겨누고 있다.
이상우(전 일간스포츠 사장) 추리소설가는 "2011년 <합작-살인을 위한 살인>과 <죽어야 사는 남자>를 통해 우리는 '손선영'이란 추리작가의 경이로운 탄생을 본다"고 말머리를 꺼낸다. 그는 "지문과 주민등록, 보험을 통해 자본주의를 통렬히 비판한 소설 속의 사건이 현실에서는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고 썼다.
신태라 <검은 집> 영화감독은 "<죽어야 사는 남자>는 서술의 교차지점을 분해하고 재조합한 하나의 거대한 퍼즐을 보는 듯하다"라며 "그렇지만 '죽어야 사는 남자'의 진실 앞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IMF를 지나온, 아니 한국전쟁을 지나온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진실이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추리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손선영은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연봉 1억 물질'과 '연봉 3백 만족' 사이에서 방황하다 만족을 택하지만 그 '만족'이 주는 여러 가지 안정된 삶에 자주 당황한다. 펴낸 책으로는 장편 <합작-살인煞人을 위한 살인殺人>이 있다. 지금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