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근태 형 장례 미사 참석기

영원한 청년 김근태 형을 떠나 보내며

등록 2012.01.03 18:51수정 2012.01.03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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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 김근태 형을 조문하고 있다 환히 웃는 김근태 형의 영정 사진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나의 심경은 착잡했다. 그의 명패엔 '김근태 쯔가랴'라고 적혀 있었다. 쯔가랴는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희망의 말씀을 전한 구약의 선지자이다. 김근태 형에게 어울리는 세례명이다.

고 김근태 형을 조문하고 있다 환히 웃는 김근태 형의 영정 사진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나의 심경은 착잡했다. 그의 명패엔 '김근태 쯔가랴'라고 적혀 있었다. 쯔가랴는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희망의 말씀을 전한 구약의 선지자이다. 김근태 형에게 어울리는 세례명이다. ⓒ 이명재


가야 할 자리가 있고, 가지 말아야 할 자리도 있다. 김근태 형의 빈소는 꼭 다녀와야 할 자리라고 생각했다. 천수를 다 누리고 고생한 만큼 대가를 누리다가 세상을 떴으면 아마 난 꼭 가려는 마음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생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찍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벌써 작년이란 표현을 써야 하겠다. 작년 12월 30일 오전 8시 30분, 그는 서울대 병원에서 유족과 가까운 지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모두들 허무하다고 했다. 이근안의 고문을 이겨낸 그를 우리는 죽음에서 멀리 있는 존재로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죽음이 그에게 닥치다니! 어떤 이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연말은 누구에게나 바쁘다. 목회자도 예외일 수 없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신년 초, 2일쯤에 조문 갈 마음을 먹었다. 2일은 지방회 신년교례회가 있어서 거기에 참석하고 서울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몇몇 지인들에게 함께 조문하면 좋겠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반응들이 신통치 않았다. 운동 노선의 차이는 죽음 앞에서도 사람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서울평강교회 박영복 목사님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박 목사님은 과거 사회운동을 뒤에서 돕는 위치에 있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회를 하고 있는 분이다. 이상욱 목사님도 서울역에서 만나 동행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장례식장으로 직접 오겠다고 했다. 퇴근 전 시간이어서인지 거목의 장례식장 치곤 조문객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약 10m 줄을 서서 대기해야만 했다. 정성껏 조의금을 함에 넣고 방명록에 서명을 했다. 나는 김근태 형에 대해 애절한 내용의 글을 쓰려다가 결례가 될 것 같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李明在 牧師'라고만 썼다. 왜 굳이 한자로 서명을 했는지 모르겠다. 방명록 서명도 전염성이 있어 맨 앞쪽 사람이 서명한 한자(漢字)를 따라 썼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죽음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김근태 형의 영정은 한없이 평화롭고 기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가식 없이 웃는 얼굴에 빨간 넥타이, 양복도 희망을 상징하는 짙은 청색이었다. 죽은 자가 마치 산 자를 위무하는 듯, 잠시 상념에 젖게 만들었다. 그에게 흰 국화 한 송이를 바치고 잠시 묵념을 했다. 이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천국에서의 삶을 위한 기도였다.


고인의 명패에는 가로 세로 같은 길이의 십자가 상 밑에 '김근태 쯔가랴'라고 적혀 있었다. 십자가 모양과 '쯔가랴'라는 세례명은 그가 천주교 신자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임종 직전 급하게 세례를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왜 영세명이 쯔가랴일까? 구약에는 여러 명의 쯔가랴(개신교식 표현은 스가랴)가 등장한다. 하지만 김근태 형에게 준 세례명 '쯔가랴'는 선지자 쯔가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선지자 쯔가랴는 소선지서 '쯔가랴서'의 저자이다. 그는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할 때 학개와 함께 성전 건축 공사를 담당한 지도자들을 격려했으며,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을 예언한 선지자였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극복 의지를 북돋았고 희망 세상을 예언한 점에서 선지자 쯔가랴는 운동가 김근태 형과 닮은 데가 있다.


유족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는데, 조문을 마치고 나와서 보니 빈소 벽 곳곳에 김근태를 보내는 아쉬움과 슬픔과 감사함의 글들이 빼곡이 붙어 있었다. 아쉬움이 넘치면 그것을 붙들어 글로 나타내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심리이다. 나는 어떤 내용의 글을 써 붙일까 하다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의 제목과 해당 면 그리고 날짜를 적어 붙였다.

장례식장으로 직접 오겠다고 한 이상욱 목사님을 기다려야 했다. 또 사민청 의장을 지낸 친구 최창우도 6시 30분까지 오겠으니 기다리면 좋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입구에서 기다리며 상념에 젖어 있는데, 경남도지사 정무특보를 지낸 홍순우 형이 멀리서 보고 달려와서 나를 끌어안았다. 반가움의 표시이다. 김두관 지사가 오고 있는 중인데 곧 도착할 것 같다는 귀뜀을 해 주었다. 5일장의 장례 기간 동안 조문 시간이 비슷해서 아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기다리던 중 몇몇 지인들을 만났다. 동아투위 위원장을 지내고 지금은 4월 혁명회 회장으로 있는 정동익 선배, 충북대 유초하 교수, 유인태 전 의원 등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세월의 흐름만큼 사람들의 외양도 많이 변해 있음을 실감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민중을 생각하고 나라의 민주주의와 조국 통일을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루 공무를 마치고 경남 창원에서 서울까지 조문을 온 김두관 지사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목사님이 먼 걸음 하셨네요"라면서 함께 조문하자고 했다. 나는 조문을 한 뒤였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몇몇 지인들과 함께 조문을 하러 들어갔다. 좋은 일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슬픈 일, 좋지 않은 일엔 함께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상도 전라도 등 먼 곳에서 일부러 조문하러 온 사람들에게 애정이 갔다.

조문을 마치고 애초 계획은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열리는 추모 문화제에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간 중간 들어오는 보고는 시작 전인데도 사람들이 몰려 입추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차를 가지고 진입이 안 될 정도로 추모객들로 넘쳐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현장을 정확히 확인하고 싶어서 명동에 있는 후배 김기태에게 상황을 자세히 파악한 뒤 연락 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십 여분 뒤 기태에게서 연락이 왔다. 실내는 사람들로 꽉 찼고 밖 스크린을 통해서 봐야 하는데 그것도 멀리서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 우린 명동성당으로 가는 것을 취소하고 박영복 목사님 교회 근처로 차를 달렸다. 이상욱 목사님과 함께 온 고광배 목사님 그리고 나와 박영복 목사님 이렇게 넷이 커피숍에 가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목회와 사회의 연결 고리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개진했다.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병행에 대해서도 의견들을 나누었다.

사회운동 선배들의 타계를 애통해 하면서 가능한 한 빠지지 않고 조문을 해왔다. 최근만 해도 법정 스님, 리영희 선생, 이소선 여사 등 여러분들이 세상을 떴다. 하지만 하룻밤을 묵으며 장레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시간적으로 예배와 겹치고 급한 일로 중복이 되어 그런 것도 있지만 김근태 형의 장례식엔 꼭 참석하고 싶었다. 그것이 마음의 짐을 덜어 주는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박영복 목사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그러니까 3일인 오늘)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장례 미사에 참석했다. 박영복 목사님이 시종 동행해주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오전 8시 30분이 장례 미사 시간이었다. 우리는 8시 조금 넘어 본당에 도착했다. 좀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우린 앞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고 보니 뒤에 재야 원로이신 이해동 목사님, 한승헌 변호사, 박영숙 전 의원 그리고 인혁당 사건의 여정남 선배의 조카 여상화 님 등이 앉아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내 주위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로는 이정희 진보통합당 공동대표, 김부겸 의원,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강정구 교수 등의 얼굴이 보였다.

성당에서의 미사 참예는 정말 오래간 만이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영영 참석의 기회를 잃고 말지도 모른다. 영결미사 집례는 안충석 신부님이 맡았고, 강론은 함세웅 신부님이 맡았다. 함세웅 신부님은 강론을 하기 전에 미국 로버트 케네디재단에서 김근태 님의 타계를 슬퍼하는 조문을 이메일로 보내왔다고 소개했다. 김근태 형은 부인 인재근 여사와 함께 1987년 이 재단으로부터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한 바 있다.

함세웅 신부님은 강론에서 "우리는 생전에 김 고문에게 '더 싸우라'고 요구했다"며 "그가 고문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전기 고문을 당한 김 고문은 그 이전과 다른 내적 외적 상처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분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며 그것을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말했다.

뒤이어 영결식은 민청련 때부터 같은 길을 걸어온 장영달 장례위 집행위원장의 사회로 이어졌다. 김상근 목사님이 개식사를 했으며 정희성 시인이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는 조시를 낭독했고, 최규성 민주통합당 사무총장이 고인에 대한 약력을 소개했다. 이어 지선 스님, 원혜영 민주통합당 공동대표,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추모사가 있었다. 김근태 형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김국주 님이 '김근태를 위한 弔詩' 낭독을, 고인의 사회운동 후배인 이인영 전 전대협 의장이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당신이 가시고 나서야 알았습니다'란 긴 제목의 조사를 읊었다.

전통 춤을 곁들인 노래로 유명한 장사익이 애슬프게 추모가를 불러 슬픈 분위기를 고조시킨 가운데 호상을 맡은 이창복 전 의원이 유족을 위로하고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뒤, 이후 장례절차를 설명하고 장지까지 함께 해 달라고 특별 부탁을 했다. 장례미사는 가신 분의 족적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참석자들의 면면들이, 그리고 신부님의 강론이 또 추도사를 한 사람들의 절제된 슬픈 심정이 그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추도사 가운데엔 모두 '당신이 못 다 이룬 뜻, 우리가 이루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었다.

영원한 청년으로만 알고 있던 김근태, 하지만 고문으로 형해화된 그의 시신은 죽음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부활의 소망을 가진 채 '민주주의자 김근태 구(柩)'라는 천으로 덮힌 관 안에 안치되었다. 그를 실은 영구차는 청계천 전태일 다리를 거쳐 그의 지역구인 민주통합당 도봉(갑) 사무실을 거쳐 많은 민주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마석 모란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민주주의에 큰 획을 그은 한 사람은 이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애석함을 씼지 못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명재 기자는 과거 서울민통련 조직국장 총무국장을 거쳐 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 부의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지방의 농촌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명재 기자는 과거 서울민통련 조직국장 총무국장을 거쳐 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 부의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지방의 농촌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김근태 장례미사 #김근태 조문 #마석 모란공원 묘지 #영원한 청년 #민청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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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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