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꼽아보니 민족의 명절 설날을 일주일 남겨놓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손전화기를 꺼내 지인에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4~5시간 늦춰질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고 마을 어른들을 따라나섰다.
친구가 가자고 권해서 나섰다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동지를 만났다며 기뻐하면서 "어디 사시는디 갑자기 대야에 가려 하시느냐?"고 물었다. 해서 "문화마을에 사는데 밖에 잘 나다니지 않아서요"라고 하니까 앞으로는 자주 만나자며 환하게 웃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할 때마다 노인 승객들이 올라왔다. 왕골 돗자리로 이름났던 '원주곡(뜰아름 마을)'에 도착해서는 뒷자리로 밀려났다. 힘겨워하며 서 있는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양심불량아처럼 모르는 체하면서 앉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큰 들판이 펼쳐지는 지역이어서 불리게 된 대야(大野). 대야면은 군산시 남동쪽에 위치하며 옛날에는 '배달뫼'라 하였고, 만경강 변 거주지 한계에 이르러 지경(地境)으로도 불린다. 군산시에 속한 기차역(옥구, 상평, 개정, 대야, 임피) 중 유일하게 승객이 타고 내린다.
버스는 20분쯤 달려 대야장터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 어른들과 함께 사람의 물결이 너울대는 시장으로 걸어갔다. 1톤 트럭에 장치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 메들리'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가 사이좋게 뒤섞이며 시골장 분위기를 돋우었다.
어른들과 헤어져 혼자 걷는데 열댓 명이 고개를 맞대고 모여 있었다. 사람들 어깨너머로 "어마, 어마 다 쏟아지네!" 소리가 들렸다. 무슨 재미있는 굿이 벌어졌는지 다가가니까 붉은 조끼를 입은 여성들이 "저희는 ○○교회에서 나왔습니다"라며 따끈한 생강차와 금방 부쳐낸 빈대떡을 나눠주고 있었다.
어디서 부치는지 20대로 보이는 몇 사람은 빈대떡을 계속 날랐다. 장터를 찾아온 손님은 물론, 좌판을 벌여놓은 노점상들에게 배달도 했다. 바람 끝이 차갑고 출출할 때 빈대떡과 생강차는 건강식. 안 먹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빈대떡 두 장과 생강차 한 잔을 얻어 마셨다.
먹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젊은 아낙이 한 장 더 드시라고 권했다. 하지만 고맙다며 사양했다. 생각지 않은 생강차와 빈대떡을 맛있게 먹고, 시장기까지 가시니까 추위가 도망가면서 몸도 유연해졌다. 흐뭇한 마음으로 먹어서 그런지 기분도 상쾌했다.
"한 마리 더 얹어 드릴팅게 사가셔유"
생선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해는 떴지만, 아직 오전이고 대부분 냉동생선이어서 비린내는 나지 않았다. 좌판에는 조기, 박대, 갈치, 병어, 아귀, 홍어, 물메기, 상어, 고등어, 싱대 등 그야말로 없는 생선 빼놓고 다 있었다. 차에 싣고 온 생선을 이제야 옮기는 상인도 있었다.
1톤 트럭에서는 "냉동 꽃게 한 마리에 천 원~" 하고 녹음된 음성이 안내 방송처럼 흘러나왔다. 생선장수 아저씨가 "자~ 싱싱한 참조기 스무 마리에 만 원!"이라고 외치며 손님을 불러 모았으나 사람들은 바라만 볼 뿐 반응은 냉랭했다. 시세를 묻기가 미안해서 발길을 돌렸다.
건어물전 역시 품목은 다양했으나 한산했다.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할 주인은 사람들과 대화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렵게 불러 멸치 한 상자에 얼마냐고 물으니까 귀찮다는 듯 "상자에 만 원이라고 적혀 있잖유"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말이 없었다.
구경만 하고 오려니까 서운했다. 해서 저만큼 떨어진 아주머니에게 박대는 어떻게 파느냐고 물으니까 수입 박대라며 작은 것은 다섯 마리 1만 원, 큰 것은 2만 원이라고 했다. 아귀는 작은 거 세 마리 2만 원, 수입 홍어는 두 마리 1만 원으로 1년 전 대목장 시세와 비슷했다.
진지하게 귀담아들으니까 장 보러 나온 사람으로 보였는지 아주머니가 "국산 박대 생물은 여섯 마리에 2만 원씩 파는디 한 마리 더 얹어 드릴팅게 사가셔유"라며 사정하듯 권했다. 구경 나왔다고 하기 미안해서 조금 더 돌아보고 오겠다며 도망치듯 생선전을 빠져나왔다.
의류가게 골목은 썰렁하기가 구경하기 미안할 정도
늦가을 단풍처럼 울긋불긋하게 물든 의류가게 골목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5분도 머물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흥정하는 손님들이 보이기는커녕 찬바람만 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아저씨는 가게 앞으로 나와 남들이 장사하는 모습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설이 가까워지면 어른들은 이런저런 상심으로 하루를 보냈다. '설날이 빚쟁이보다 무섭다!'는 어른도 있었다. 그러나 철부지 아이들은 달랐다. 새 옷, 새 고무신, 세뱃돈 등 생각만 해도 1년 중 가장 좋은 날인데, 걱정하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옛날에는 대목을 가장 먼저 알리는 곳은 맞춤옷 가게가 몰려 있는 '양키시장'이었다. 명절을 열흘쯤 남겨놓고 맞춰야 제때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성복을 취급하는 재래시장이나 시골 장날도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의류가게 골목은 구경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썰렁했다.
의류가게 골목에서 빠져나와 채소전, 과일전 등을 돌아봤다. 그러나 아직 오전이어서 그런지 분위기는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사람이 붐비고 상인들의 기가 팔팔하게 살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인들도 오후 장과 다음 장날(21일)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시골 장터 구경의 '백미'는 역시 방앗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