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지상 주차장 풍경내가 사는 아파트의 관리시무소에서는 화단의 나무들과 저층 세대 주민들을 위해 '전진 주차'를 권유하는 팻말까지 화단에 설치해 놓았지만, 주차장 길가의 차량들 때문에 핸들 각도가 잡히지 않아 대부분의 차량들이 '후진 주차'를 하고 있다.
지요하
나는 그날 보험회사에 사고 설명을 한 다음 상대차량 수리 의뢰를 했다. 30년 가까이 운전을 하면서 보험회사에 접촉사고에 따른 상대차량 수리 의뢰를 하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대인, 대물, 자차, 자손 등 네 가지 보험 항목을 통틀어 지금까지 보험회사에 수리 의뢰를 하기는 이번을 합해 상대 차량에 대한 접촉사고 수리만 단 두 번인 것이었다.
보험회사는 흔쾌하게 수용을 해주고 렌터카 비용도 제공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역담당 직원이 상대차량 운전자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때고 편리한 시간에 차를 정비업체에 맡기고 렌터카 비용을 청구하라고 했다. 그런 내용을 내게도 자세히 알려줬다.
결국 차량 수리 문제는 그렇게 가닥이 잡혀 한 시름 놓게 됐는데, 나는 여전히 죄의식 아닌 죄의식을 지녀야 했다. 접촉사고 사실을 내 쪽에서 미리 상대 쪽에 알려주지 못한 실책 때문이었다. 그쪽에서 나를 양심 불량자로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늘 손에 묵주를 쥐는 것은 내 오래된 습관인데, 10층의 부부를 아파트 로비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는 묵주를 쥔 내 손이 불편해지는 현상을 겪어야 했다. 또 나는 그 집의 귀엽게 생긴 두 여자아이의 눈치도 살피곤 했다, 혹여 엄마와 아빠가 대화 중에 나를 나쁘게 여기는 말이라도 해서 아이들이 그 말을 들었다면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눈빛도 다를 터이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것이 내가 가장 크게 걱정하는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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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여자아이의 이름을 숙지한 다음 아이들의 엄마를 볼 때마다 '○○엄마'라는 호칭을 썼다. 그 후로 간혹 엘리베이터에서 ○○엄마를 만날 때마다 차량 수리 여부를 묻곤 했다. 두 아이를 기르고 살림을 하면서 남편의 내과의원 근무도 하는 ○○엄마는 몹시 바쁜 것 같았다. 시간이 없어 아직 차를 고치지 못했다고도 했고, "정비업체에 가면 다른 고급 차들 수리를 하느라고 정신들이 없어서 우리 차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났는데도 ○○엄마는 차를 수리하지 않았다. 생활이 워낙 바쁘기 때문이리라는 생각으로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곧 그 문제를 까맣게 잊었다. ○○엄마나 아빠를 아파트에서 만나는 경우도 드물었고, 접촉 흔적이 별로 뚜렷하지도 않으니 '차 수리를 하지 않고 그냥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는가 보다'라는 생각도 들어서, 나는 점차 그 문제를 잊게 됐다.
그러다가 얼마 전 아침에 1년 전 같은 날의 '생활일기'를 읽던 중 이른 아침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를 뺄 때 길가의 아반떼 승용차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던 얘기를 접하게 됐다. 나는 ○○엄마가 아직 차를 수리하지 않은 사실을 상기했고, 다시금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됐다. 그래서 1년 전의 그 일에 대해 다시 사죄할 겸 한 가지 선물을 하고 싶었다. 내과의원으로 과일이라도 한 상자 보내 줄 생각을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빠, 내과의원 원장님의 이름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과의원으로 과일 한 상자라도 보내려면 원장님의 이름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낮에 그 내과의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 여직원에게 정중하게 원장님의 함자를 물으니 누구시냐고 했다. 나는 태안예총 회장이라는 내 직함을 말해줬다.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바로 ○○엄마였다. 왜 전화를 했느냐고 묻기에 1년 전의 차량 접촉사고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커서 과일이라도 한 상자 보내드리려 한다고 하니, ○○엄마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태까지 차를 고치지 못하고 있는데, 그쪽으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한번 묻지도 않는 게 과연 옳은 태도냐고 내게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쪽에서 바쁘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즉시 보험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지역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자세한 얘기를 했다. 매일 아침에 지난해 오늘의 '생활일기'를 읽어보는데, 지난해 오늘의 '생활일기' 중에 차량 접촉사고 얘기가 있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상대차량 운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안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담당 직원은 걱정 말라고 했다. 지금이라도 그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차를 고쳐주고 렌터카 비용도 지불하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직원은 ○○엄마와 다시 통화를 한 모양이었다. 내게 ○○엄마와의 통화 내용을 전해줬다.
그 후로도 ○○엄마는 차를 고치지 않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만났을 때 물어보니 똑같은 대답이었다. 바빠서 차를 정비업체에 맡길 시간도 없고, 어렵게 시간을 내서 차를 가지고 가면 크고 작은 사고 차량들이 워낙 많아서 자기 차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엄마의 태도에서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엄마가 내게 미소를 짓는다는 사실이었다. 전에는 쌀쌀한 태도에 찬바람이 돌 정도였다. 그런 ○○엄마가 내게 먼저 인사도 하고 다정하게 말도 걸어주고, 내가 묻는 말에 웃음으로 대답을 해주곤 하는 것이었다.
지난 설 명절 후에는 친정에 다녀왔다는 ○○엄마를 아파트 로비에서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고향이 전주라고 했다. 나는 더럭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전주는 내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충청도 태안 토박이인 내 아버지가 전주에서 신부를 맞아 신혼 살림을 했던 곳이었다.
○○엄마는 끝내 차를 고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 미안한 마음은 더욱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는 왜 차를 고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미안한 일이 됐다. 하지만 그 일로 해서 나와 ○○엄마는(○○아빠도) 좀 더 친숙한 사이가 된 것 같다. 이제는 ○○엄마와 아빠를 만나는 것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다. 서로 유쾌하게 말을 주고받을 수가 있게 됐다. 한동안 차갑게 느껴졌던 ○○엄마의 예쁜 얼굴이 요즘에는 더욱 예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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