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지도 않고 쓰는 마음이 손바닥에 만져진다

[서평] 송유미가 쓴 <당나귀와 베토벤>

등록 2012.02.14 08:51수정 2012.02.14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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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 인상(人象),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곧 보살이 아니니라."  - <금강경>, 대승종정분에서

부산 출신의 중견 시인인 송유미 시인의 시 속에는 분명 2500년 전의 전설이 수줍게 도사리고 있다. 석가모니가 사위성 급고독원에서 정좌의 자세로 앉아 있을 때, 제자인 수보리가 옷을 여미며 보살의 마음가짐을 물어 보았던 그 전설이.

 

부처는 상(相)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알에서 태어난 것, 어미 뱃속에서 나온 것, 습한 데에서 나온 것, 형상이 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이 모든 중생들을 멸도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며 부처는 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혹여 송유미 시인은 상의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금빛 놀이 아스라이 번지는 포구의 풍경, 그 포구 속으로 유유히 들어오는 황포돛배의 자태, 강가의 은빛 갈대가 하느작하느작 실바람에 흔들거리는 수채화. 그녀의 시에는 이런 풍경이, 이런 수채화가, 여래가 말한 모든 상의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묻어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처연한 탐색을 간직하고 있다. 모든 상의 본질 너머에 있는, 인식론의 틀을 과감히 거부하는, 그녀만의 거울을 찾고자 하는 마음인 것이다. 

 

 <당나귀와 베토벤> 겉표지
<당나귀와 베토벤> 겉표지지혜
<당나귀와 베토벤> 겉표지 ⓒ 지혜

미움이 마음에 눌어붙으면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는 주전자를 보면서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게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청청히 흐르는 물을 보아도

묶은 때를 씻을 수가 없구나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

제 가슴 하나 헹구지 못하고

오늘도 아침저녁 종종걸음 치며

죄 없는 냄비의 얼굴만 닦고 닦는다

-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에서

 

미움이 마음에 눌어붙으면 이처럼 닦아내기 어렵다고,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 제 가슴 하나 헹구지 못한다고 시인은 한탄한다. 이 모든 게 바로 상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는지. 누룽지가 들러붙은 냄비에 스민 증오, 타인의 결점을 보며 위안을 느끼는 자기만족. 보통의 인간은 모두가 이런 상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적어도 이런 상에서 벗어나고자 갈고 닦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시인 저마다가 자신의 색깔로 간직하고 있는 '시적 언어'인 것이다.

송유미 시인의 시적 언어는 과연 무엇인가? 근원으로 향하는 길? 자신의 성찰? 낯설음이라는 가면에 가려져 있는 고민? 이런 관성적이고 타성적인 언어로 한 시인의 시적 언어를 평가한다는 것 또한 상의 집착이 아닐까? 시는 아상(我相)과 인상(人象)의 상대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라는 본질과 너라는 본질이 부딪히면서 생성되는 관계 속에서 시는 탄생하는 것이다. 송유미 시인은 이런 본질의 맥을 향해서 그녀만의 독특한 시적 언어를 창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시집 속지. 프로필과 시인의 얼굴.
시집 속지. 프로필과 시인의 얼굴.지혜
시집 속지. 프로필과 시인의 얼굴. ⓒ 지혜

총 네 부로 이루어진 그녀의 시집, <당나귀와 베토벤>. 제1부 가대기 시인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서시는 비수처럼 선뜻하다. "모든 것은 끊고 맺음에서 생기는 고통이었다" "숫돌 위에서 무뎌지는 감성" "누가 내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다면"이라는 선언.

 

그러나 제2부 라면 끊이는 낙타에선 그 섬뜩함이 약간의 낭만과 위트로 승화되기도 한다. 이런 위트는 제3부에서도 이어져, "닥종이로 만든 여자"에선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아침이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또 꿈꾸게 하는 여자"를 결코 버릴 수 없다며 절규하는 화자의 태도. 그건 상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제 4부 빈집은 다분히 그녀 주변의 이야기라는 소박한 인상을 준다. "빈집"에서 엄마를 그리워하고, 유클리드와 함께 한 24번째의 산책을 끝내며 희미한 조등을 밝히는 시인. 그녀 시에서 연작 형태로 등장하는 유클리드는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부처일지도 모른다. 선형과 비선형의 세계, 형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송유미 시인이 그려내고자 하는 시적 세계는 거울의 반대편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을 찾는 여정인 것이다. 그 거울 너머, 상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싶은, 외롭고 쓸쓸한 여정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당나귀와 베토벤> (송유미 씀 | 지혜 | 2011.12. | 1만 원)
이 기사는 <국제신문>에도 송고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당나귀와 베토벤

송유미 지음,
지혜, 2011


#송유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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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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