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의 겨울눈이 내렸다. 홍살문 아래에서 바라본 풍경인데, 저 뒤쪽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흥무전까지 언제 올라가나 싶은 걱정이 앞선다.
정만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민족의 노래 <아리랑>.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고 노래하고 있다. 노래는 4km, 즉 10리를 가까운 거리로 보고 있다.
태령산 아래 김유신 생(生)가와 도당산 기슭 길상사(祠) 사이의 직선 거리는 10리. 사람의 길은 돌고 돌아 그 둘의 거리를 늘여놓았지만, 자연의 길은 하늘을 밟고 가는 까닭에 그저 10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두 길은 다르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생가와 길상사, 삶과 죽음을 의미하는 두 집의 거리는 과연 가까운 것일까, 아니면 먼 것일까?
김유신 생가와 길상사는 직선거리로 10리삶과 죽음의 거리가 궁금하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의 생가와 사당을 보면서 문득 그런 의문에 빠져든다. "(먼저 죽은 동생이) 형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라고 노래한 박목월의 시 <하관(下棺)>은, 저승에서 이승은 가깝고 이승에서 저승은 멀다고 말하는데….
살아 있는 지금이 '사람'이라면 죽음의 세계는 '자연'이다. 현실에 매달린다면 길고도 길고, 내세를 바라본다면 짧고도 짧은 것이 태어나고 죽는 사이의 거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생을 생애(生涯)로 표현해왔다.
삶[生]은, 흙과 물이 닿아 있는 물가[涯]와도 같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생애[一生]' 속에 '저만치' 떨어진 채 존재하지만 사실은 서로 끝[涯]을 닿고 있다는 것이다. 물에 젖은 흙은 물인가, 흙인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저만치'의 두 세계가 바로 이승과 저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