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 시인의 구두.
김병기
시인의 낡은 랜드로바 한 켤레. 한 장의 사진 속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의 오른쪽 발뒤꿈치가 구겨져 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싸움 때 포클레인 위에서 실족해 다친 상처가 아물지 않은 탓이다. 불과 두 달여 전 그는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출소하면 제일 먼저 반짝반짝 깨끗하게 닦은 구두를 신고 두 발로 천천히 웃으면서 걸어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출소하자마자 이 랜드로바를 신고 절룩거리면서 한진중공업 노조원들과 하룻밤을 지샜다. 그 다음날은 유성기업 노조원들과, 그리고 쌍용차 지부에서 1박2일을 한 뒤에야 집에 들어가 골아떨어졌다. 그리고 이번 주 중으로 용산참사 현장에서 재발한 목디스크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가야 한다. "시는 온몸으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던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그는 이 시대 우울한 노동의 서정시를 온몸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온몸으로 써내려간 그의 서정시'희망버스 기획자' 송경동 시인과의 낮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309일 만에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오던 날 기자와 잡았던 술 약속은 세 달여가 흐른 뒤인 지난 13일에야 지켜졌다. 칼국수와 파전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 잔을 들이키자 그의 얼굴은 금세 불그스레해졌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정리해고라는 절망의 바이러스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쌍용차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21명이 죽었습니다. 한 공장에서 쫓겨난 해고 노동자들도 그들처럼 삶의 골방에 갇혀있거나 벼랑 끝에 서 있겠지요.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은 슬로건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구제역보다 더 끔찍한 전염병입니다."그렇다면 김진숙을 살린 희망버스 불씨는 왜 쌍용차로 옮겨붙지 못한 것일까? 85호 크레인으로 향했던 수많은 희망버스 승객들은 왜 쌍용차행 버스에 탑승하지 않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공안탄압입니다. 5차까지 이어진 희망버스 행렬을 막기 위해 총 360여 개 중대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매번 7000~8000명의 공권력을 풀어서 압박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손잡고 왔다가 사진이 찍혀서 소환조사를 받은 사람이 240여 명에 달합니다. 또 200여 명이 추가 조사 대상자입니다. 저도 풀려나긴 했지만 거주지 제한에 묶여 있습니다. 쌍용차에 대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이런데 일반인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크레인 위에 서 있다하지만 그는 "희망버스를 시작할 때 '우리는 모두 각자의 크레인 위에 서 있는 게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했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가 나와 별개가 아니라는 연대의식이 생겼다"면서 "공안탄압 등으로 900만 명의 비정규직을 고립시키는 구조가 문제지만, 이미 한차례 승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희망버스의 운전대는 이미 쌍용차로 돌려졌다"고 강조했다.
"희망이 승리한다." 그가 지난 9일 부산구치소 문을 나오면서 외친 말이다. 실제로 그는 "여러 개의 혐의가 덧씌워진 '전문시위꾼'인 내가 보석으로 출소한 것도 그렇고, 빈 공약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최근 새누리당조차도 재벌규제와 일자리 문제 등에 대한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겠다고 말하는 형국"이라며 "희망버스를 시작할 때처럼 막막하기도 하지만 쌍용차와 재능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고통의 연대'는 현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나치 독일 치하 때 쓰여진 시 한 편을 소개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뒀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아무도 항의해줄 이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왔을 때> 마르틴 니묄러감옥에서 나비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