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마가렛 대처(오른쪽) 부부
필라멘트 픽쳐스
영화 <철의 여인>(The Iron Lady)이 우리에게 선을 보인 때가 아주 공교롭다. 바야흐로 2012년 대한민국은 앞으로 있을 두 번의 큰 선거를 앞두고, 한국의 첫 여성 총리를 지낸 야당 대표와 어쩌면 첫 여성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사실상 여당 대표 두 '여인'이 팽팽한 힘 겨루기를 하고 있는 때가 아닌가. 그 뿐이 아니다. 최근 닻을 올린 진보정당의 공동 대표에 또 다른 두 명의 여인이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일찍이 한국 정치의 맨 앞자리를 이처럼 여성들이 차지한 적은 없었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영국의 첫 여성 총리인 '마가렛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를 다루고 있다. 영화도 때를 잘 만났지만, 이들 여성 정치인들에게도 영화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영화 배급사도 이를 홍보에 발 빠르게 이용하고 있다. 맥스무비와 함께 '2012년 대한민국을 움직일 철의 여인이 누구인가'를 묻는 조사에서 힘겨루기가 한창인 박근혜와 한명숙이 나란히 정치 부문의 첫째와 둘째 자리에 올랐다. 이쯤 되면 이들 여성 정치인들 가운데 누군가가 메릴 스트립(<철의 여인>의 주인공)을 한국에 불러들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부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당신의 기대와는 조금 다를 영화이 영화에 눈길이 갔던 이유가 단지 한국 정치에 불고 있는 여성 바람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연기는 무결점이다"(The Guardian)라는 찬사를 받은 메릴 스트립의 아름다운 연기를 보고 싶기도 했고, 영국을 넘어 세계 경제의 흐름을 바꿔놓기도 했던 이른바 '대처리즘(Thatcherism)'에 대해 영화가 어떻게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아마 앞서의 여성 정치인들도 비슷한 이유로 이 영화를 그냥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들이 영화관을 찾은 뒤 SNS에 어떤 느낌을 전할지도 자못 궁금해진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영화는 정치인을 다루고 있을 뿐, '정치'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감독인 필리다 로이드 역시 "<철의 여인>은 정치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 누구보다 대단하면서 동시에 많은 약점을 안고 있는 위대한 정치인을 그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셰익스피어 고전에 가깝다면 가깝다. 권력과 권력에서의 추락, 그리고 성취감 가득하던 삶이 갑자기 끝났을 때 개인이 마주하는 삶의 무상 같은 것…."(필리다 로이드 감독, 맥스뉴스, 2012.2.20)'대처리즘'에 대한 평가도 당연히 없다. 영화는 그녀가 정치인으로서, 총리로서, 혹은 여성 정치인이자 여성 총리로서 부딪혀야 했고 또 넘어서야 했던 1940~80년대 영국의 낡은 것들을 가까이 비추고 있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내각이 시민들과 격렬하게 맞부딪히는 장면은 그저 멀찍이 떨어져 흘러가듯 보여줄 뿐이다.
공공부문 노조의 파업으로 런던 시내에 쓰레기가 넘쳐나던 풍경도, 탄광 폐쇄에 맞서 광산 노동자들이 파업 시위를 벌이던 풍경도, IRA(아일랜드공화국군)가 런던 해러즈백화점 근처에서 차량 폭탄 테러를 일으킨 풍경도, 그리고 인두세를 낼 수 없다며 수십만 명의 시민이 들고 일어난 풍경도 모두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정치를 깊이 다루지 않음으로써 논란을 비껴간 것이 꼭 흠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며, 작가와 감독은 다만 자신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거짓 없이 담아냈을 뿐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라 너그럽게 넘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참고로 영국 <BBC> 기자였던 시옵한 컬트니(Siobhan Courtney)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 금융시장의 규제를 완화한 사실에 대한 언급이 영화에 나오나? 브리티시 텔레콤을 포함한 20개의 국영기업을 민영화해 부자들에게 지분을 팔아 단기간에 돈을 벌게 해 준 것은? 언급이 없다. … 대처가 1970년대 교육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7세 이상 아동에 대한 우유 무료급식을 중단해 '우유 날치기범 대처(Thatcher Thatcher, Milk Snatcher)'라고 불렸던 것도 영화에선 찾아 볼 수 없다. 놀랍게도 '그의 가장 격렬한 국유화 정책 중 하나'로 불리는 고등교육에 대한 국고지원 삭감에 대한 언급도 없다."(시옵한 컬트니, 알자지라, 2012.1.17 / 프레시안, 2012.1.24 재인용)아마도 마가렛 대처 시절을 몸소 겪었을 이 기자는 대처의 개혁 정책들이 몹시도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몇 년 전 미국에서 시작해 유럽을 거쳐 전세계로 퍼진 금융 위기로 신자유주의가 한풀 꺾인 오늘 대한민국에서, 굳이 이 영화에서 '대처리즘'을 끄집어내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여성 정치'나 '여성 정치인'이라는 뻔한 이야깃거리도 실은 이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2012년 정치의 해에 대헌장의 나라 영국에서 날아온 이 영화를 두고 우리는 대체 어떤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까.
인간 '마가렛 대처'를 만날 수 있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