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든 이는 이 두 바퀴 탈것이 주는 속도감에 꽤 만족한 듯하다. 빠르다는 뜻의 셀레레(Celere)와 옮기다는 뜻의 페로(Rero)를 새로운 발명품에 붙였으니 말이다. 흡사 지금 고속철을 보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30여 년 뒤인 1817년엔 독일 귀족 카를 폰 드라이스(Karl von Drais) 백작이 드라이지네(Draisine)를 만들었다. 셀레리페르와 달리 손잡이를 움직여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게 특징이었다. 발명가들은 두 바퀴 탈 것의 특징을 속도에서 찾았다. 드라이지네는 '빨리 걷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두 바퀴 탈 것을 본 사람들 또한 그리 믿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여물도 먹지 않고 똥도 누지 않으며 갑자기 난동을 부리지도 않는 이 새로운 탈 것을 벨로시페드(Velocipede, 빠른 발)라고 불렀다.
벨로시페드는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두 배 이상 빨랐다. 좋은 길에선 대략 8-10km 정도를 냈다. 1817년 독일 남서부 도시인 만하임(Mannheim), 첫 시승에서 드라이스 백작은 한 시간 동안 14km를 움직였다. 성인이 3시간 이상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최고 19km를 냈다는 기록도 있다. 1818년엔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에서 프랑수아 라그랑주(Francois Lagrnage)가 벨로시페드를 타고 시속 19km로 48km 정도를 달렸다.
초창기 자전거를 보는 사람들 시선은 '빠름'이었다.
"인류가 스피드를 사랑하게 된 것은 자연적 자세로 자기 자신이 스피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점차 여러 가지 기구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정교한 기구기계가 발명되게 되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고안된 최초의 기구는 자전거이다."-매일신보(1937년 3월 13일)
1800년대 중순 페달 달린 자전거가 나온다. 이제 자전거는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19세기 중순부터 말까지 자전거는 속도경쟁을 상징하는 도구였다. 나귀와 벨로시페드가 대결을 벌였고, 1842년엔 역마차와 대결을 벌여 이겼다. 1894년 첫 자동차 경주가 파리-루앙 간 126km 구간에 걸쳐 개최됐을 때, 평균속력은 18km/h, 자전거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자전거는 탈 것 중에 세상에서 가장 빨랐다.
같은 시기 20km 안팎의 속도는 조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19세기말 조선에 철도가 개통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철도 속도는 시속 20km. 독립신문 기자는 직접 열차를 타본 뒤 다음과 같은 감상기를 남겼다.
"수레 속에 앉아 영창(映窓)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자전거를 맛본 이들은 속도를 즐기기 시작했다. 한 번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계속 달리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빠른 교통수단은 더 빠른 교통수단에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자전거 또한 비슷한 길을 걸었다. 뒤이어 나타난 오토바이가 자전거를 위협했고, 차도의 마지막 승자는 가장 빠른 자동차 차지였다. 인력거와 마차, 우마차 등은 결국 차도에서 사라졌다.
재미있는 점은 속도경쟁에서 패배한 교통수단이 모두 쓸쓸하게 뒤안길로 사라진 반면, 자전거는 '느림'으로 재탄생하며 부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점점 더 빨라져만 가는 세상에서 오히려 '빠름'에서 '느림'으로 진화한 경우는 그 사례를 찾기 힘들다. 자전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1930년대 '스피드업' 경쟁, 자전거 유행에서 밀려나다
구한말 '빠른 교통수단'으로 각광받던 자전거는 1920년대 이후 속도면에서 전차와 기차, 자동차 등에 자리를 내준다.
그 시기 속도경쟁은 자동차가 주도했다. 1911년 채 10대도 되지 않던 자동차가 1931년이 되면 조선 전체에 4000대가 넘을 정도로 늘어난다. 경성에만 400대 가까이 됐다.
시대는 점점 더 빠른 속도를 요구했다. 경성 시내에서 1923년 1600여대 정도 되던 인력거는 1932년 130여대 수준으로 급감한다. 같은 해 경성 시내에서 마차는 자취를 감춘다.
유지비가 많이 드는데다 속도까지 느린 교통수단은 자동차 속도 앞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자동차와 함께 자전거가 꾸준히 늘 수 있었던 건 어쨌든 유지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빠른 교통수단은 기차였다. 일본정부는 조선을 거쳐 만주까지 이어지는 빠른 이동로를 만들고자 했다. 자신들의 통치력을 빠르게 전파하고 그곳에서 만들어낸 이익을 본국으로 실어오기 위해선 빠른 교통수단이 필수였다. 빠른 교통수단에 목을 멘 건 당연했다.
'스피드업'이란 이름이 유행이 됐고, 급행열차 계획이 연이어 세워졌다. 1933년 4월 1일 급행열차 운행 실시를 앞두고 이름을 공모했고 '광光'이란 이름으로 결정 났다. 빛만큼 빠르다는 뜻이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빠른 기차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잘 드러난다. 동경에서 출발한 열차가 만 이틀 만에 만주 신경에 도착했는데 당시 시간 기준으론 놀랄 만한 속도다.
1935년에 이르면 동경과 신경 간을 35시간 만에 주파하는 스피드계획이 나왔으니, 거침없는 질주였다. 계획에 따르면 동경에서 경성까지는 단 하루만에, 부산에서 경성까지는 겨우 6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놀라운 속도를 내는 열차에 대해 당시 언론은 '초초특급'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탄환열차'라는 별명도 붙었다.
1933년 4월 4일 동아일보엔 재미있는 기사가 한 편 실린다. 만일 현재 있는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달나라까지 여행을 한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분석한 기사였다.
기사에 따르면 가장 느린 교통수단은 사람의 다리로 7년이 걸렸다. 그 다음이 자전거로 2년이 걸린다. 여기까지는 느린 교통수단이다. 빠른 교통수단은 초특급열차부터다. 달까지 약 4개월이 걸린다. 뒤이어 모터보트, 경주용자동차, 비행기 순으로 빨라진다.
이미 몇 십 년 만에 자전거는 느린 교통수단이 돼 버린 것이다. 미국 캠벨시(Cambell city)에서 운영 중인 시민자전거소방대에 대해 1935년 7월 31일자 동아일보가 "스피드시대와는 인연이 먼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하니 유쾌한 존재"라고 신기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통수단의 '스피드업' 혜택을 모두가 입을 순 없다. 1933년 4월 당장 의정부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 50여 명이 학교에 갈 수 없게 돼버렸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배차시간이 달라진 결과였다. 학부모들이 대책을 요구했지만 당국에선 뾰족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여러 불편을 고려치 않고 밀어붙인 결과였다.
이동속도를 높이기 위해 기차가 머무는 시간도 줄였으니, 승객은 좀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자동차들이 속도를 내면서 시민들 불만도 따라서 높아졌다. 우선 자동차가 일으키는 흙먼지가 골칫거리였다. 당시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길이었다. 자동차가 한 번 지나가면 주택가와 인근 밭엔 수북이 흙먼지가 쌓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민가와 행인에 흙물이 튀었으니 그 피해 또한 심했다. 교통사고 또한 늘었다.
처음에는 오로지 자동차에 비난이 쏟아졌다. 자동차는 얼마 되지 않았고 낯설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자동차 숫자가 제법 늘어난다. 무엇보다 힘 있는 이들이 자동차를 몰았다.
1930년대 말 경찰이 나서 구간을 정해준다. 자동차는 전차 궤도에 가까운 중심부를 자전거는 차도 가장 왼쪽을, 수레는 자전거와 자동차 중간을 통과하라고 지침을 내리고, 어길 시 엄벌하겠다고 강조한다. 드디어 속도에 따라 달리는 길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속도경쟁에서 뒤쳐진 자전거, '느림'으로 부활하다
사람들은 뒤늦게 자전거의 '느림'에 주목했지만, 애초부터 자전거엔 '느림'이란 성격이 스며들어 있었다. 1868년 파리에서 열린 자전거대회에서는 속도경기와 함께 느리게 달리는 경기가 함께 열렸다. 넘어지지 않고 목표지점까지 가는 경기였다. 이 때 자전거는 서있지는 않지만 걷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나아간다. 빨리 달리기 위한 욕망이 빚어낸 자전거 속에서 '느림의 욕망'을 찾아낸 기획자의 안목이 놀랍다.
미국이 '빠름'을 추구했다면 유럽은 상대적으로 '느림'을 선택했다. 찰리 채플린에 버금가는 거장으로 인정받는 프랑스 영화감독 자크 타티는 영화 '잔칫날'(Holiday, Jour De Fete, 1949년)을 통해 자전거와 속도경쟁을 우화처럼 표현했다.
주인공은 우편배달부다. 프랑스 작은 시골 마을 플랭빌에서 잔치가 열린다. 일 년에 한 번씩 잔치가 열리는 이 마을에선 잔칫날이면 서커스단이 찾아와 공연을 보여주고 영화를 보여준다. 이번엔 미국의 우편배달시스템을 다룬 작품이 주제다. 보다 넓은 지역에 빨리 배달하기 위해서 헬리콥터까지 동원하고 때로는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미국인 배달부가 나온다.
그 영화를 본 관객들은 동네 우편배달부 프랑수아(감독인 자크 타티가 주인공을 맡았다)와 비교하며 그를 놀린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편을 배달하는 미국 배달부에 비해 자전거로 배달하는 프랑수아는 느리기만 하다.
게다가 프랑수아는 편지를 나르다가도 짐을 진 이를 보면 같이 짐을 나르고, 이웃이 술을 권하면 같이 마시다 얼큰한 기분으로 편지를 나르기도 한다. 그래도 자신은 우편배달 업무에 매우 만족했고,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 프랑수아에게 마을 사람들의 조롱은 견디기 힘들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프랑수아는 미국인 배달부처럼 아주 빠르게, 보다 많이 편지를 배달하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자전거 경기 대열에 끼어 달리기도 하고, 속도를 높이기 위해 트럭 뒤에 매달려 달리기도 한다.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부딪치고, 구르고, 다친다. 그래도 달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미국 우편배달부에게 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전고투를 치르지만 어느 순간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 우편배달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프랑수아는 실의에 빠진다. 그런 그를 한 할머니가 격려한다. 좋은 소식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면서. 그런 소식은 프랑수아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가 전달해야 한다면서. 할머니의 말을 듣고 힘을 얻은 프랑수아는 예전과 같이 편지를 배달하고, 모든 것은 예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잔치는 끝난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영화와 달리 자전거는 점점 추억이 돼버리고 차도는 자동차가 점령했다. 그대로 자전거는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신세였다.
역설적으로 자전거를 다시 불러낸 건 자동차였다. 계속 빨라지던 자동차 속도는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힌다. 자동차가 너무 빠르게 늘면서 아무리 도로를 늘려도 속도가 늘지 않게 된 것. 더 나아가 정체시간이 길어지면서 자동차 평균 속도는 자전가 수준으로 떨어졌다. 자전거가 더 빠르다는 주장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속도경쟁의 한계이자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한계이기도 했다. 적절한 통제 없는 무한경쟁은 결국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사람들은 어렴풋이 알게 됐다.
자전거가 나타난 것은 단지 에너지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속도에 대한 그 사회의 수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북유럽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자전거가 흥하고, 미국과 남유럽, 우리나라에서 자전거가 홀대 받는 것은 그래서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를 쓴 진보 신학자 이반 일리히는 속도 문제를 불평등의 문제로 봤다.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선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고속 사회에선 반드시 에너지 불평등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 에너지를 많이 쓰는 부유한 계층과 에너지를 거의 쓸 수 없는 가난한 계층으로 나눠진다는 것. 비행기와 고속열차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비교해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지적이다.
자전거 중심으로 도시 교통을 재편하자는 주장에 대해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거냐'는 반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수시로 교통정체가 벌어지는 도심 교통속도는 마차가 다니던 시절이나 다름 없다. 철저하게 자동차에 맞춰진 교통체계와 자동차 중심으로 만들어진 소비구조가 자동차왕국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해서 자전거 속도에 맞추자는 주장이 '옛날로 돌아가자는 거냐'는 지적은 맞지 않다. 특히 이미 자전거 또한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평지에서 100km 가까이 나오는 자전거까지 나온 상황이니 말이다. 느림과 빠름을 모두 지닌 자전거의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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