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의 돌을 쌓아 만든 석탑. 구형왕릉과 일견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만진
이 돌무덤을 석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비슷한 사례로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의 '방단형 적석탑(方壇形積石塔)'을 들기도 한다. 방단형적석탑이라는 이름은 납작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평평하게 깔아 네모(方)난 마루(壇) 모양(形)의 1층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같은 방식으로 (1층보다는 면적이 조금 좁은) 2층을 쌓고, 또 3층을 올리고… 그렇게 돌(石)을 쌓아(積) 탑(塔)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모양은 특이하지만 감실이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탑들과 마찬가지다. 구형왕릉과 의성의 방단형 적석탑이 돌들을 마루처럼 깔아 각 층을 만들었고, 감실을 갖추었으며, 민중들의 기도처였다는 점에서 같으니 둘 다 탑이라는 견해이다.
경북 의성군 방단형 적석탑과 닮았는데<삼국유사>에는 금관가야의 멸망에 대해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구형)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王使親軍卒).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彼衆我寡) 대전을 할 수가 없었다(不敢對戰也).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신라에 항복했다(降于新羅)'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도 처음에는 직접 참전하여 신라군과 싸웠던 모양인데, 군사의 수가 적어 상대가 되지 않는 바람에 항복을 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5천 군사를 가지고 5만의 신라군과 싸운 계백은 무엇인가? 구형왕은 왜 끝까지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하였을까?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신라의 경순왕처럼 '(전쟁을 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애민(愛民?) 정신을 발휘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금관가야의 구형왕은 물론 고구려의 보장왕, 백제의 의자왕, 신라의 경순왕, 고려의 공양왕, 조선의 순종 등 그 어느 마지막 임금도 싸우다가 죽지 못하고 한결같이 항복하여 당장의 목숨을 보전한 우리의 역사를 보는 마음은 어쩐지 불편하다.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것을 예상하였을까, 구형왕은 자신의 무덤을 돌더미로 쌓도록 했다. 망국의 왕이 어찌 그럴 듯한 봉분을 할 수 있겠느냐면서 아무렇게나 돌을 던져 자신의 주검을 덮으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나라를 잃고 왕산에 들어와 5년을 살다간 구형왕, 그의 유언은 아마도 '나에게 돌을 던져라' 하는 뜻이었던 듯하다. 살아 마지막 말이 그처럼 처연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구형왕은 생애 최후의 5년을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돌 아래에 깔려 누워있는 왕을 보며, 이제는 왕릉 앞의 비석에 새겨진 '駕洛國讓王陵' 여섯 글자를 '가락국 구해왕릉' 일곱 자로 바꿔드려야 옳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가 비록 신라와 싸우다가 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의 생명을 걱정하여 항복한 마음만은 진실이었을 터, '양왕'이라는 시호(諡號)는 너무나 지나친 신라 중심의 표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2012년 2월 중순에 현지를 답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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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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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인가 무덤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특이한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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