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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의 꽉 찬 대야들, 그리고 내 할머니
대전 용문역 4번 출구 앞. 매일아침 출근하는 길. 메주덩어리 두어 개, 곱게 볶은 깨, 요근래 뜯었음직한 냉이, 붉은 팥, 검은 콩 등이 차례로 담겨진 고무대야들과, 들기름이 담겨 있는 작은 기름병 2개. 몇 걸음 더 걷다보면, 청국장덩어리를 비닐에 싼 뭉치들이 담겨있는 모습도 보인다.
눈여겨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결혼을 하고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결혼을 하니 요리를 보다 다양하게 하면서 이런 음식 재료들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유년기를 보내긴 했지만, 농산물은 내게 엄마가 해주는 음식의 일부라는 생각뿐이었고, 더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계기로 한 가지 음식을 만들더라도 다양한 재료들이 필요했고, 그 한 가지 한 가지의 재료가 부단한 노력으로 인해 맺어진 결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모든 농산물과 그 부산물이 소중히 여겨지게 되었다. 소중한 것들이 담긴 대야들, 봉지들, 그 뒤에는 더 소중한 내 할머니께서 고개를 숙인 채 앉아 계셨다.
인도 가장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 할머니
내가 유년기에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곳은 전라북도 익산시에 속해있는 망성면이다. 충남 강경이 가까웠고, 행정구역상으로는 익산이지만 그 동네 사람들의 생활구역이 논산이었을 정도로 충남권과 훨씬 가깝고 밀접한,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지역에 살았었다. 버스로 십여 분만 타고 나가면 강경이었다.
유년기엔 할머니도 우리 가족이었다. 내 할머니는 일을 손에서 놓는 적이 없으셨던 분이다. 농토가 있었음에도 다른 직종을 업으로 삼으셨던 나의 부모님을 대신하여 칠십이 넘도록 일꾼을 사들여가며 일 년의 반 이상은 논과 밭에 나가계셨다. 그 나머지는 버스를 타고 강경시장에 나가 수확한 곡식과 채소 등을 파셨다.
내가 초등학생·중학생시절, 큰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다른 사람들 뒤이어 시장 앞에서 버스에 오르시던 할머니를, 전 정류장에서 버스에 먼저 타 있던 내가 외면했던 시간들은, 길에서 장사를 하고 계신 고개 숙인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내게 구름처럼 다시 떠오른다.
할머니가 버스에 올라타시고 할머니와 내가 눈이 마주치기까지 나의 시선은 할머니에게 가 있었지만, 그 다음 시선과 대화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로 돌리곤 했다. '꼭 그렇게 무거운 것을 이고 지고 시장에 나가야만 하는지… 그것도 남루한 차림으로…' 우리 집이 가난한 것도 아닌데...속으로만 투덜투덜 불평을 해 가면서 말이다. 십여 분이 지나 버스에서 내리고, 친구들과 헤어지자마자 동네입구에서 나는 할머니의 짐을 뺏어 들며 말을 했었다.
"할머니, 그거 이리 주세요."
"됐어. 책가방도 무겁잖아. 할미가 들게."
"…………."
유난히 무뚝뚝하고 말이 없었던 유년기의 나는 결국 할머니께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후, 할머니께서도 버스에 타셔서 나를 찾게 되면 얼른 고개를 숙이고 돌리시는 모습을 나는 보게 되었고, 그렇게 몇 번이 반복되도록 할머니께서는 내게 '이래라, 저래라' '네가 잘못했구나' 등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유년기를 지나 학창시절도 흘러갔고, 내가 학교가 멀어 자취를 해 나가살던 대학생 때,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셔서 몇 년 고생하신 뒤 돌아가셨다. 살아계신 동안 내 할머니는 내가 창피해 할까봐 버스에서 마주치는 족족 고개를 숙이며 돌리셨다. 길가에 팔 것들을 펼쳐놓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계신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내 할머니가 겹쳤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할머니의 함지박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과거의 그 시간들은 정성들여 수확한 소중한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이 부끄럽게 여겨져 할머니를 보는 둥 마는 둥 한 것보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못한 것, 할머니의 함지박을 끝까지 고집하여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시간들이다.
함지박을 내손으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해서일까? 나는 어릴 때나 마찬가지로 여전히 할머니의 함지박 속에 어떤 소중한 것들이 들어있었는지를 모른다. 아마도 냄새를 싫어하는 손자, 손녀 때문에 할머니의 방 안에서만 띄워졌던 메주 몇 덩어리가 있었겠지. 잘 여문 콩을 가득 담고 있는 콩대를 도리깨로 두들겨가며 할머니 손으로 튀어나오게 한 콩 몇 바가지 였겠지. 밭에서 푸릇하게 자라났던 가지 몇 개, 고추 한 봉지, 달달 볶은 들깨를 짜낸 빈 소주병의 들기름 몇 병 이었겠지.
먼지 쌓인 상자 안에서 소중한 이들에게 받았던 종이냄새도 사라진 편지들을 들추어보듯, 할머니께서 일구셨던 집 근처 곳곳의 밭과 마당에서 자라나던 여러 농작물을 기억의 중심으로 끄집어내며 할머니의 함지박을 마음으로 그려보았다.
"할머니! 일 욕심 많으셨던 내 할머니! 철없던 손녀가 밉진 않으셨죠? 서른이 다 된 손녀가 이제야 철이 들었습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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