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 마련된 선거종합상황실에서 박근혜 중앙선대위원장을 비롯한 이양희, 이준석 비대위원, 당직자들이 지상파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유성호
반면 새누리당은 그들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붉은색을 당의 새로운 색깔로 수용할 정도로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와 새로운 변화를 이미지 메이킹 하는 데 승부를 걸었다. 물론 내부에서는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외형적으로는 변화 의지를 피력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진보정당에서나 나올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같은 구호를 거리낌 없이 수용함으로써, 야권의 차별화 전략을 무력화 하는데 일조했다. 결국 야권은 변화를 갈망하고 여권은 안정을 목표 삼았지만, 외부로는 정반대의 메시지가 표출된 것이다. 야권은 새로움이 없었고, 여권은 변화를 선포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야권의 패착은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내용을 당위나 전제로 제시해 버린 안일함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와 새누리당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과연 너희들이 그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데도, 야권은 "정권이 싫으면 우리를 찍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끊임없이 '2013년 체제'를 외쳤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새로운 체제는 내용 없는 빈껍데기로 남아있다. 야권은 선거 초기 공천 문제에 매몰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논의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쳐 버렸다. 국민들은 4년을 기다려 왔지만, 야권은 마치 평소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하는 학생 마냥, 시간에 쫓기면서 반MB만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 너희들 지지해야 하나" 답 줘야 물론 이런 평가는 모두 결과론적인 것일 수 있다. 사실상 이명박 정부 4년 동안 진행된 수많은 일들은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을 위한 것이었다. 사상 초유의 방송사 동시 파업을 불러온 언론통제나 대대적인 사찰은 모두 2012년 정권 재창출을 향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전방위적으로 펼쳐진 새누리당의 막강한 지역조직은 구호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견고한 벽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야권은 이런 문제를 상수로 간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희망의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 야당의 승리는 정권심판의 한 가닥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수도라는 지리적 특성과 거주지와 근무지가 분리된 구조적 특성은 서울 지역 유권자들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중앙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이른바 '지상전'보다는 '공중전'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선이 다른 어떤 선거보다 공중전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야권의 대선 전망이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
문제는 혁신이다. 박근혜 위원장을 비롯한 새누리당은 총선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스스로 변화의 주체임을 자임해 나갈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별 것 아닌 변화나 정책도 국민 눈높이에서 본다면 대단한 혁신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국민이 우리 마음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야권에게서는 새로운 변화의 의지를 읽기 어려웠다. 국민들은 지금의 야권이 보여줄 수 있는 변화의 최대치를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그것 정도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김대중·노무현 정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의 변화로는, 정치 무관심을 극복할 만한 희망과 야권에 대한 지지 의지를 발휘하게 만들기는 어렵다.
혁신뿐이다. 야권 스스로의 혁신은 물론, 한국 정치 전반의 새로운 판을 제기해야 한다. 껍데기뿐인 2013년 체제의 내용을 하루 빨리 채워 넣어 국민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세세한 숫자 싸움이나 국민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술적 정책 내용보다는, MB 이후에 뭐가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포괄적 비전이 필요하다. 그래서 "왜 너희들인가?"에 대한 국민의 질문에 열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야권에겐 아직 140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