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 법문을 한 스님은 누구?

[서평]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경허>

등록 2012.04.24 11:35수정 2012.04.2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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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허 스님이 한 때 강백으로 활동하던 계룡산 동학사
경허 스님이 한 때 강백으로 활동하던 계룡산 동학사임윤수

스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여느 스님들과는 달리 고기도 먹고 술도 마셨습니다. 온몸이 고름과 나병으로 찌들어 악취를 풍기는 광녀를 자신의 방으로 들여 몇 며칠 동안 함께 동거를 하기도 했습니다. 시비를 걸어 매를 자청하기도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어머니를 비롯해 법문을 듣겠다고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알몸을 드러내며 '저를 보라'고 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해도 미치광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 미치광이 같은 행동을 머리를 깎고 가사장삼을 걸친 스님이 벌건 대낮, 법당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리 보면 깨달음의 경지를 넘어선 출가수행자의 무애한 구도행이고 저리 보면 계를 파한 타락승의 일상일 뿐입니다. 비속비승, 속인도 아니고 출가수행자도 아닌 경계의 삶이었기에 시비가 따를 수밖에 없겠지만 때로는 미치광이처럼 때로는 경지를 넘어선 선승이었던 분은 다름 아닌 경허스님입니다.  

그러함에도 경허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스님입니다. 어쩌면 선수행을 추구하고 있는 한국불교조계종 자체가 경허 스님이 남긴 발자취며 흔적입니다. 때로는 미치광이처럼 보이기조차 했던 경허 스님이 근현대사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속비승, 속인도 아니고 중도 아닌 경허

1957년에 태어나 1974년에 출가해 46세인 2002년에 작고한 일지 스님의 글을 민족사에서 낸 <경허>에서 그 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경허>는 경허 스님의 일대사, 경허스님이 내디딘 구도행각의 궤적을 등고선처럼 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면적으로 담고 있는 이정표 같은 글이 아니라 삼수갑산의 지형과 높낮이를 가늠하게 하는 등고선처럼 기행적이기 조차한 경허 스님의 삶과 구도행각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경허> 표지 사진
<경허> 표지 사진민족사
9세에 출가하여 34세에 이름을 떨치는 명강사가 되는 경허, 환속한 옛 스승을 찾아가는 길에서 맞닥뜨린 생사의 기로에선 절박함은 경허 스님이 추구하던 구도행각의 궤도를 바꿔 놓습니다.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딪쳐서 수마를 쫓는 필사적인 정진으로 대오한 경허 스님의 2막 구도행각은 구도자의 고독함이며 선승의 실천입니다. 그 고독함과 걸림 없는 실천이 세상 사람들에겐 기행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습니다.


아아, 가련한 경허, 그의 사후 한 세기가 못 되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 고승으로 자라나고 그를 사숙한 선승들은 이 나라 불교계의 지도자로 존경과 예우를 받으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게 되지만, 정작 경허 자신은 그 외진 북방의 한 산촌에서 홀로 설날을 지내다가 누군가가 보내 온 음식을 얻고 이렇게 기뻐했던 것이다.

참 처연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 경허가 북방에서 남긴 시편에는 취식(取食) 후의 고마움을 표하는 내용이 많다. - <경허> 319쪽

이 몇 줄의 글에 일지 스님이 정리한 경허스님의 일대사와 근현대한국불교에서 경허스님의 위상이 진하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농사의 흉풍은 가을걷이에서 판가름 나고, 자식 농사의 성패는 늘그막하거나 사후에나 판가름 납니다.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들이 짓는 제자 농사의 성패 역시 그 후대에서 확인 할 수 있는데 근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선승들이 경허스님의 후학들입니다.

대한 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인 한암 스님이 경허스님의 상좌였고,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이나 해외 포교로 널리 알려진 숭산 스님처럼 내로라하는 당대의 스님들 대부분이 경허스님이 법맥을 이은 법손들이니 한국불교사에서 경허 스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명됩니다.

경허를 경허답게 한 것에 대한 해답, <경허>

그러함에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경허 스님이 보인 기행적인 삶이며 그 삶이 그려낸 선승으로서의 궤적입니다.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파계를 일삼던 스님, 세속인들도 차마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기행, 어머니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는 기행을 보인 경허 스님의 행동에 함축된 진면목이 궁금해집니다.  

세월을 흐른다. 어떤 사람은 잊혀지고 어떤 사람은 사라져 버린다. 어떤 사람은 급격한 생의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간다. 그러나 경허의 죽음, 모든 것이 무(無)로 변해 버린 그 부재(不在)의 자리에는 비극적인 요소가 없다.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비도(非道)를,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완성한 그 점이 경허다운 것이다. - <경허> 330쪽

이해되지 않고 궁금하기만 한 경허스님에 관한 진실, 경허를 경허답게 한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비도(非道)를,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완성한 그것들에 대한 질문이나 궁금증이라면 일지 스님이 쓰고 민족사에서 출간한 <경허>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덧붙이는 글 | <경허>┃지은이 일지┃펴낸곳 민족사┃2012. 4. 20┃값 13,000원┃


덧붙이는 글 <경허>┃지은이 일지┃펴낸곳 민족사┃2012. 4. 20┃값 13,000원┃

경허 -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일지 지음,
민족사, 2012


#경허 #일지 #민족사 #만공 #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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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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