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당선자.
권우성
-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활동도 그 맥락에서 시작하게 된 건가.
"인간의 존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계적 평등보다 다른 만큼 인정받기를 원했다.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을 때, 나를 12시간씩 고문하면 잠깐 동안 고문관들도 쉰다. 쉴 때 그들은 아이와 집 얘기를 했다. 아주 거리낌 없이. 날 인간으로 안 본 거다. 고문하는 당사자가 인간으로 보이면 고문 못한다. 고문을 당할 때도 느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수모를 겪으며 산다. 평생 자존감을 잃고 절망하고. 내가 고문 당할 때, 가축인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렇게 존엄을 말살했다. 인간사회에서 모두가 다 똑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각자의 존엄함을 누릴 권리가 있다. 지금은 그걸 복지국가라고 부르지만, 80년대에는 그 개념이 사회주의였던 게다."
- 문제는 권리라는 화두를 내걸게 된 이유는 뭔가."1인 1표가 모두의 존엄을 보장하지 않는다. 나는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라고 생각한다. 선거일이 휴일이지만 일당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은 투표하기 어렵다. 그런 사람이 굉장히 많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또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투표권을 행사하기 힘들다. 아파트촌은 투표하기 좋게 동선이 짜여져 있지만, 다세대 주택가는 투표소를 찾아가야 한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정규직은 소리를 낼 수 있지만 비정규직이 소리 낼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철저하게 '1원 1표'다. 비정규직도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그냥 항상 눈이 간다. 아침 일찍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타면 유리 닦는 아주머니가 눈에 보인다. 그럼 묻는다. 하루에 몇 개 닦으세요? 힘드시죠? 너무 잘 얘기해 주신다. 나한테 무슨 직업병인지는 모르겠으나 꼭 그분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분들의 한숨, 현장이 익숙하다."
"감옥에서 보낸 6년, 내 인생에 큰 영향"- 감옥에서 6년 지낸 것이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아마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감옥에서 워낙 많이 아팠다. 안기부에 끌려갔을 때부터 형기를 마치고 출옥할 때까지 폐렴, 후두염 등 병을 달고 살았다. 나는 창문이 없는 독방에서 내내 격리돼 있었다. 그렇다고 혼거방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5평 남짓에 20~30명이 자니까 사람이 미워지게 된다. 지금은 좀 나아졌겠지만, 그땐 열악했다. 사람들이 죄가 밉지 사람이 밉냐, 그러는데 실제 교도소에 가면 사람이 밉다. 5평에 스무명이 자면 칼잠을 잔다. 그래서 교도소에 온 사람들은 인과응보라고 생각한다. 감옥에 있을 때 여러 사람들과 친해져서 나중엔 항소이유서, 진술서도 써주고 그랬다. 너무 딱한 사정인데 국선 변호사는 안 오지, 그럴 때 도왔다. 코치도 했다. 절대 판사님 앞에서 말씀 격하게 하지 마세요, 이렇게. 그때 온갖 사연을 다 들었다."
- 지금도 기억나는 사연이 있나."남편을 죽인 여자가 있었다. 대개 여자가 살인죄로 들어오면 직계 존속이거나 가족을 죽인 경우가 많다. 한국은 묘한 가부장 문화가 결합돼 있어서 사람 죽인 것을 용서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왜 그가 사람을 죽이게 됐는지 그 과정을 알게 된다. 스물여덟의 여자였는데, 나랑 또래였지만 인생역정이 완전히 달랐다. 나는 정말 부잣집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잘 자랐고 나름 서울대를 다녔지만, 그는 열여섯에 팔리다시피 시집을 갔고 여차여차해 남편을 죽였고 감옥에 온 게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 맘이 아팠다. 그때 강릉교도소에서 이분이 1심에서 사형 선고 받고, 2심 때 공주 감호소로 갔는데, 그 뒤론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 또 다른 사연도 있나."중학생 아이들이 가출을 해서 혼숙하다 본드를 흡입해 교도소에 왔는데 이 미성년자들을 어디에 넣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교도관들이 내 방에 둘을 넣어서 함께 두 달 남짓 지냈다. 정말 순진한 여중생들이었다. 그들의 사연도 억장이 무너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얘네들이 교도소 밖을 나간들 받아줄 사회적 품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교도소에서도 이들을 받을 곳이 없이 그냥 일반인과 함께 수용한 거다. 그밖에 사기죄지만 경제사범들. 아, 그중 슈퍼마켓에서 500원짜리 뭐 하나 훔쳤다가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정말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 그분들이 은 당선자의 신분을 알고 뭐라 하던가."내가 집시법 위반으로 들어왔다고 하니까, 첫 번째 반응이 이거였다. 한국에도 집시가 있어요? 하하하.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면, 사실 이데올로기라는 것 별 거 아니다. 나중에 그러더라.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어? 하하. <조선일보>가 나에 대해 쓰는 그런 얘기들, 그건 정말 지나친 과포장이다. 만나보면 정말 많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 감옥에서 상당한 치유를 하고 출옥한 셈인가?"독방에 있으니까 나중에는 혼잣말도 하고 진짜 입에 거미줄 치는 줄 알았다. 스스로 뭔가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게 심리학 공부였다. 그런데 교도소 나온 뒤에 진짜 힘들었다. 1년6개월이 악몽이었다. 고소공포증에 폐소공포증.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무섭고 자신이 없었다. 이상한 행동도 하고. 밤마다 가위에 눌리고, 똑같은 상징을 보고. 내가 왜 이러는지 설명이 안 됐다. 그래서 학교에 간 거다. 공부를 하려고 간 게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간 거다. 사회 속으로 곧장 뛰어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그곳에서 치유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게다. 내가 성격이 굉장히 낙천적이고 명랑했는데 진짜 많이 힘들었다."
- 사노맹 사건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해보고 싶다고 했는데."사노맹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아직도 그때의 이야기를 서로 나눠본 적이 없다. 너무 가슴 아프고 끔찍한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이런 끔찍한 외상을 겪은 사람들이 치유의 과정을 겪어본 일이 없다. 아마 과거의 기억을 별로 원하지 않아서 정보공개청구도 안 해본 것 같다. 지금은 이 정도로 객관화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진짜 차마 다 얘기할 수 없는 지독할 꼴들을 많이 봤다."
- 어떤 꼴이 그토록 지독했나."안기부의 고문 방법이 있다. 내가 가장 믿었던 동료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거두절미하고 딱 내 이름을 대는 걸. 충격이 아주 크다. 또 누군가가 진술서를 쓰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필경 안기부는 내가 무너지는 꼴도 타인에게 보여줬을 것이다. 사람은 매우 약한 존재인데 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이건 굉장히 잔인한 짓이다. 그런 과정까지 겪었기 때문에 내가 용서가 안 됐다. 실은 내가 묵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