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열사의 묘소에서 한 부부가 무덤가의 잡초를 뽑고 있는 모습.
김명곤
그 광주를 너무 보고 싶었다. 미필적 고의로 인한 죄책 때문에 보고 싶었고, 사죄하는 공범자의 마음으로 보고 싶었고, 세월의 날 속에 무뎌질 것만 같은 양심을 곧추세우기 위해서도 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20세기 분단 조국에 태어난 '나'라는 인간의 실존의 근거를 제공해주고, 역사의식의 무지 상태를 벗어나게 해주었고, 운명 공동체적 '구원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고마움 때문에 광주를 보고 싶었다.
김포공항을 떠난 지 24년 만에 밟은 고국 땅의 2월은 매섭게 추웠고, 망월동에는 찬 바람만 쌩쌩 불고 있었다. 샛길로 빠졌다는 미안한 생각에 장모님께 먼저 소재를 알렸다가 괜한 '오해'를 샀다.
"어메 김 서방, 뭔 일로 망월동에 가 있능가? 어무이 상 치르고 화장했다더니 망월동에 모셨는 갑네?" 호스피스 병동에 1년 반 동안을 누워 계시던 어머님은 내가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실눈으로 나를 잠깐 올려다본 후 1시간 만에 돌아가셨고, 상을 치르자마자 고속열차를 타고 망월동에 먼저 들렀던 터였다.
망월동에 먼저 간 사위를 어리둥절해하시는 장모님께 얼버무리듯 말하고는 묘역을 빠짐없이 둘러보았다. '오프시즌'이어서 그런지 방문객이 어쩌다 하나씩 눈에 띌 뿐 한산했고, 한쪽에서 인부들이 무슨 공사를 하고 있었다.
묘지석 앞에 서서 5·18 당시 사망한 영령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영령들, 민주화운동 공로 영령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다 보니 다시금 죄책감이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와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들 중에는 생전에 만났던 이름들도 있고, 낯익은 이름들도 있었다.
저수지에서 친구들과 멱감다 계엄군의 사격에 죽은 방광범(사망 당시 13세), 5·18 및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중단식으로 사망한 박관현, 광주항쟁 유혈 진압을 항의하며 투신한 김의기, 이성으로 우상을 타파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리영희 교수, 거대한 민주화의 흐름에 몸을 실은 무명의 열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