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란히 쉴 삼형제 부부큰아버지 부부, 합장묘로 만든 둘째 큰아버지 부부, 맨 끝에 아버지 어머니묘다. 생전에 살뜰한 삼형제는 아니었지만 돌아가셔서는 같은 곳에 쉬고 싶으셨나 보다.
한진숙
바람 한 줄기 없는 5월의 뙤약볕 아래서 오빠들은 옛날의 엄마처럼 쉬지 않고 일한다. 살아계실 때 가묘를 만드는 효를 행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부모님 묘를 만드는 일이 즐겁지 만은 않을 터다. 혹시 뗏장이 벗겨질라 빈틈을 꼼꼼히 메우고 동그랗게 예쁜 봉분 모양 만드느라 오빠들의 손과 발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아버지는 당신이 들어갈 묘에 직접 뗏장을 얹고 거동이 불편한 엄마는 큰 댁에 있으시라 해도 "봐야제"라며 묘지 옆을 지킨다. 아버지는 당신의 묘라서인지 유독 고집을 내세우신다. 뗏장은 겹쳐놓는 것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를 듣지 않고 "알도 못험시롱"이라며 뗏장을 꼼꼼히 겹쳐 놓는다. 사촌들 중 맏이격인 큰 댁 오빠가 한마디 하신다.
"하고 잡픈디로 하게 두시오. 당신 집잉게 당신 맘대로제.""그라제!" 누군가 맞장구친다. 하하하! 포크레인 소음만 가득하던 들판에 한바탕 웃음이 번진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죽음보다는 애잔하면서도 가슴 따뜻해지는 죽음이면 좋겠다 싶다. 부모님을 묘지에 안장하는 미래의 그날, 아버지의 "알도 못험시롱"이 떠올라 눈물을 매단 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엄마는 50년을 같이 살면서 많이 어그러졌다. 자식들 키우는 동안은 앞날 준비에 바빠 두 분이 같은 방향을 바라봤지만, 우리들이 장성하자 두 분 사이는 급격하게 벌어졌다. 무언가 몰두할 것이 필요했는지 아버지는 잠시 한 눈을 팔았고, 엄마는 그때부터 "니 애비"라는 말로 아버지 이름을 대신했다. 아버지와 엄마의 갈등이 너무 깊어 자식들이 이혼을 권할 정도가 됐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똥밭에 궁구러도 서방 그늘 밑이 나슨 뱁이제."젊은 나는 그런 엄마에게 적잖이 실망해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라는 문구를 가슴에 새겼던 기억이 있다. 엄마에게 아버지 옆에 묻히게 돼서 행복하신지 묻는다.
"갈 디가 업슨게 허기는 헌다만, 합장은 절대 안허제."즉답은 피한다. 합장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나마 엄마의 자존심을 지키신 듯. 엄마 세대의 가치관으로써는 갖은 풍파를 이겨내고 이 집안 선산에 묻히는 것이 최대 영예이기도 한 모양이다. "부잣집 메느리라서 죽어서 살 집도 맨들고 참말 부럽소이"라는 동네분들 말에 엄마가 "글지라우. 내가 부잣집 막내 메느리 아녀라우"라고 응수하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인자 느그들 큰 일은 읍다. 상 치를라믄 뫼똥 맨드는 것이 질 큰 일인디. 갖다 묻기만 허믄 된게."가묘를 짓고... 나도 향할 곳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