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인데, 빨리 시켜"... 우리 가족의 '이중 생활'

생협 제품 애용하고 자가용도 안 쓰지만, '패스트푸드' 끊기 어렵네

등록 2012.06.16 11:32수정 2012.06.1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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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구울까?"
"……"
"됐고! 햄버거 시키자."
"올레! 난 빅맥!"
"난 불고기버거!"
"난 새우버거!"

일요일 오전 11시경 늦은 아침을 먹고, 오후 2시쯤 되면 우리 식구들은 허기진 배를 채울 궁리를 한다. 저녁식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식사를 하기엔 애매하다.

두세 시간 만에 또 요리를 하자니 엄마인 나는 귀찮기만 하다. 사실 엄마는 요리 하느라 법석 떠느니 배고픈 쪽을 택하고 싶다. 다만 남편과 아이들의 아우성을 견디지 못할 뿐이다. 주말동안 남편과 아이들은 왜 그렇게 자주 배가 고픈지.

내가 요리하기 편한 구운 감자·고구마는 가족에게 철저히 무시당한다. 무언가 지지고 볶는 요리만이 환영받는다. 30분이면 뚝딱 해물떡볶이 한 냄비를 만들 수 있지만, 엄마에겐 그 30분이 몹시 길다. 그것 마저 매운 맛을 원하는 남편과 큰 애, 매운 맛을 거부하는 꼬맹이들의 의견이 엇갈려 어중간한 맛의 떡볶이가 되기 일쑤다. 가끔 남편이 부지런을 떨어 어묵꼬치 한 냄비를 만들어 끼니를 해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가끔 있는 일이다.

생태적인 우리 가족, 주말이면 '정크푸드족'으로 변신

결국 우리는 만만한 메뉴인 햄버거,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다. 시킬 때마다 흔쾌하지 않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일주일에 한 번인데 뭐' 라면서 슬쩍 모른 척한다.

"햄버거 냄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햄버거 배달을 받을라치면 위층에 사는 아이가 계단으로 내려와 흥분된 얼굴로 말한다. 우리 집은 마포 성미산마을 공동주택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이하 소행주)'이다.

이곳의 구조상 냄새가 강렬한 음식이 지나가면 윗집 아랫집 아이들이 금세 알아차리고 아는 척을 한다. 부부 싸움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층간 소음차단이 잘 되어 있지만, 자극적인 음식 냄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복도에 퍼진다. 윗집 아이에게 "같이 먹을래?" 하면서도 '저 아이 엄마가 싫어할텐데' 싶어 얼굴이 화끈거린다.


소행주 사람들은 햄버거, 피자를 거의 시켜먹지 않는다. 웬만한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옥상에서 지렁이를 키우며, 과일이나 감자 등은 껍질째 먹을 정도로 생태적인 삶에 정성 쏟는 집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집은 정크푸드(열량은 높지만 영양가는 낮은 패스트푸드·인스턴트식품)의 천국이다. 주말에만 먹는다지만, 어쨌든 습관적으로 먹는 셈이니 말이다. 우리 집도 생협(생활협동조합) 제품을 애용하고, 자가용도 없는 생태적인(?) 집이지만 주말만큼은 전혀 아니다.

지난주에도 세 아이들과 나는 자전거를 타고 전철역에 있는 맥도날드에 가서 햄버거를 사먹으며 두 시간 동안 놀다 왔다. 본래는 직접 만든 간식을 챙겨 자전거 타고 한강에 가서 놀다 올 생각이었지만, 결국 자전거 타는 것만 실행하고 끼니는 편한 쪽으로 해결해버렸다. 햄버거 가게는 왜 그렇게 놀기 편하고 먹기 편하게 만들어서 나를 유혹하는지 원.

미국의 한 대학 연구팀은 정크푸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정크푸드가 우리 뇌에 영향을 주어, 특정 장소에 가면 특정 음식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영화관에 가면 으레 팝콘을 먹는 듯이, 배고픔이나 맛에 상관없이 환경이나 습관에 의해 중독된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나른하고 별다른 할 일 없는 일요일 오후만 되면 햄버거나 피자를 먹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요염하게 닭다리 뜯는 '걸그룹'... 뚫어져라 바라보는 딸

 검게 그을은 감자, 속 타는 엄마 마음. 깨끗하게 씻어 오븐에 구운 하지감자.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남편과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한 개 먹어주면 그저 고마운 신세.
검게 그을은 감자, 속 타는 엄마 마음. 깨끗하게 씻어 오븐에 구운 하지감자.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남편과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한 개 먹어주면 그저 고마운 신세.한진숙

'중독' 어쩌고 하는 연구 결과를 들먹이지 않아도 요즘 우리 아이들의 입맛을 보면 걱정스럽다. 사춘기에 접어든 큰 아이는 물론 어린 동생들까지 점점 찐 감자나 구운 떡에 흥미를 잃고 있다. 그나마 말캉하게 삶아 소금을 살짝 뿌려 오븐에 굽는 웨지감자나 베이컨에 돌돌 말은 구운 떡 정도는 돼야 감자튀김이나 햄버거에 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엔 엄마의 부지런함이 기본이 되어야 하니, 게으른 엄마는 이런 현실에 자주 무릎 꿇는 중이다.

정크푸드를 애용하는 이런 습관이 혹시 텔레비전 탓은 아닐까? 소행주 9가구 중에 텔레비전 있는 집은 우리 집 포함 딱 두 집뿐이다. 텔레비전 있는 또 다른 집의 냉장고에도 우리 집처럼 치킨집 번호와 피자 가게 스티커가 붙어있다. 쿠폰 10개를 차곡차곡 모아 공짜로 한 판을 맛나게 시켜먹는 것도 그 집과 우리 집이다. 다른 집들도 가끔 시켜 먹긴 하지만 어쩌다 한 번이다. 햄버거 가게 홈서비스 번호는 아예 모르는 모양이다.

매일 접하는 미디어에서 정크푸드 광고를 익숙하게 보고 듣는 것이 정크푸드를 편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건 아닐까. 도톰한 스테이크에 빵을 살포시 얹는 햄버거 광고, 인기 남자 배우가 치즈를 길게 늘어뜨리며 먹는 피자 광고를 매일 보는 우리에게, 햄버거와 피자는 이미 너무 익숙한 먹을거리가 되었다. 늘씬한 걸그룹이 등장해 요염하고 앙증맞게 닭다리를 뜯는 치킨 광고가 나올 때, 사춘기 딸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마치 닭다리를 뜯으면 인기 폭발 걸그룹처럼 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이쯤 되면 텔레비전을 없애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일까? 우리 집 살림 중에 냉장고 다음으로 값 나가는 50인치 디지털 텔레비전이 거실에서 "어림없는 소리!"라고 하는 듯 검게 번쩍거리고 있다.  

얼마 전 미국 디즈니채널이 자사 방송에서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식품 광고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주요 시청자인 아이들의 비만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해 그런 조처를 내린다고 한다. 신선하다. 소파 깊숙이 파묻힌 채 햄버거를 먹으며 디즈니 방송을 보는 아이들이 많을텐데, 그 어마어마한 광고 수익을 포기하겠다니 말이다.

미국 방송 행태를 자주 따라가는 우리나라 방송도 언젠가는 햄버거와 피자, 치킨 광고를 규제하게 될까? 그런 광고의 빈자리를, 껍질째 먹는 감자의 담백한 맛에 흠뻑 빠진 걸그룹의 모습으로 채우길 바란다. 나 같은 사람들이 얼굴 화끈거리지 않고 윗집 아이도 불러 같이 먹을 수 있게끔.

얘들아. 요즘 제철 만난 보성 하지감자가 진짜 맛나단다. 제발 먹어주지 않으련? 남편아 부탁해!
#햄버거 #피자 #정크푸드 #소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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