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그을은 감자, 속 타는 엄마 마음. 깨끗하게 씻어 오븐에 구운 하지감자.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남편과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한 개 먹어주면 그저 고마운 신세.
한진숙
'중독' 어쩌고 하는 연구 결과를 들먹이지 않아도 요즘 우리 아이들의 입맛을 보면 걱정스럽다. 사춘기에 접어든 큰 아이는 물론 어린 동생들까지 점점 찐 감자나 구운 떡에 흥미를 잃고 있다. 그나마 말캉하게 삶아 소금을 살짝 뿌려 오븐에 굽는 웨지감자나 베이컨에 돌돌 말은 구운 떡 정도는 돼야 감자튀김이나 햄버거에 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엔 엄마의 부지런함이 기본이 되어야 하니, 게으른 엄마는 이런 현실에 자주 무릎 꿇는 중이다.
정크푸드를 애용하는 이런 습관이 혹시 텔레비전 탓은 아닐까? 소행주 9가구 중에 텔레비전 있는 집은 우리 집 포함 딱 두 집뿐이다. 텔레비전 있는 또 다른 집의 냉장고에도 우리 집처럼 치킨집 번호와 피자 가게 스티커가 붙어있다. 쿠폰 10개를 차곡차곡 모아 공짜로 한 판을 맛나게 시켜먹는 것도 그 집과 우리 집이다. 다른 집들도 가끔 시켜 먹긴 하지만 어쩌다 한 번이다. 햄버거 가게 홈서비스 번호는 아예 모르는 모양이다.
매일 접하는 미디어에서 정크푸드 광고를 익숙하게 보고 듣는 것이 정크푸드를 편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건 아닐까. 도톰한 스테이크에 빵을 살포시 얹는 햄버거 광고, 인기 남자 배우가 치즈를 길게 늘어뜨리며 먹는 피자 광고를 매일 보는 우리에게, 햄버거와 피자는 이미 너무 익숙한 먹을거리가 되었다. 늘씬한 걸그룹이 등장해 요염하고 앙증맞게 닭다리를 뜯는 치킨 광고가 나올 때, 사춘기 딸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마치 닭다리를 뜯으면 인기 폭발 걸그룹처럼 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이쯤 되면 텔레비전을 없애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일까? 우리 집 살림 중에 냉장고 다음으로 값 나가는 50인치 디지털 텔레비전이 거실에서 "어림없는 소리!"라고 하는 듯 검게 번쩍거리고 있다.
얼마 전 미국 디즈니채널이 자사 방송에서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식품 광고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주요 시청자인 아이들의 비만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해 그런 조처를 내린다고 한다. 신선하다. 소파 깊숙이 파묻힌 채 햄버거를 먹으며 디즈니 방송을 보는 아이들이 많을텐데, 그 어마어마한 광고 수익을 포기하겠다니 말이다.
미국 방송 행태를 자주 따라가는 우리나라 방송도 언젠가는 햄버거와 피자, 치킨 광고를 규제하게 될까? 그런 광고의 빈자리를, 껍질째 먹는 감자의 담백한 맛에 흠뻑 빠진 걸그룹의 모습으로 채우길 바란다. 나 같은 사람들이 얼굴 화끈거리지 않고 윗집 아이도 불러 같이 먹을 수 있게끔.
얘들아. 요즘 제철 만난 보성 하지감자가 진짜 맛나단다. 제발 먹어주지 않으련? 남편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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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데, 빨리 시켜"... 우리 가족의 '이중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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