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지 않은 구석기 초기의 사람들. 전곡리 유적지에 있는 모형.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소재.
김종성
최초의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처럼 아무것도 입지 않고 살았을 것이다. 성경 창세기 2장 25절에서도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라고 했다.
구석기 사람들은 식물의 잎이나 짐승 가죽으로 몸을 보호했다. 창세기 3장의 이야기도 동일하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에덴동산 중앙의 과일을 먹은 뒤부터, 비로소 수치심을 느끼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다음에는 가죽으로 몸을 가렸다.
인간이 직조기술을 발명한 것은 신석기 시대에 접어든 뒤의 일이다. 이집트인들은 삼베를, 인도인들은 무명을, 중국인들은 비단을, 유럽인들은 모직물을 개발했다.
고대 한국의 경우, 모시나 삼베는 서민층의 옷이고, 비단은 부유층의 옷이었다. 의복의 빈부차이는 <명심보감>(성심편)에도 반영되어 있다. 재산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란 의미로 "꽃이 졌다 꽃이 피고, 피고 또 지며, 비단옷과 삼베옷도 교대로 바꿔 입는다"고 했다.
이 말은 비단을 입는 부유층도 삼베를 입는 서민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부유층은 비단을, 서민층은 삼베를 입는 실정을 반영하고 있다.
지금은 여름에 시원하라고 입는 모시나 삼베를 옛날 서민들은 한겨울에도 입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추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봄·여름·가을에도 밤에는 꽤 쌀쌀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600년 전만 해도 한국인들은 이렇게 살았다. 한국인들이 옷을 든든하게 입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600년 전에 한국인들의 의류생활에 일대 혁명을 갖다 준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문익점이다. 그가 목화씨를 갖고 오지 않았다면, 우리 선조들이 밤마다 추위에 얼마나 떨었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고려 멸망 61년 전인 1331년, 문익점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과거시험에 급제한 것은 서른 살 때인 1360년이다. 4년 뒤, 그는 사신단 서열 3위인 서장관 자격으로 몽골제국(원나라)을 방문했다.
비교적 일찍 과거에 급제했지만, 몽골 방문을 계기로 그는 비운을 맞이한다. 몽골에 체류할 당시 고려 왕족 덕흥군의 쿠데타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것이다.
덕흥군은 몽골의 지원을 받아 고려를 침입했다가 실패한 인물이다. 반(反)몽골 자주화 정책을 펴는 공민왕에 맞서, 몽골이 덕흥군을 대항마로 내세웠던 것이다. 하필 그때 몽골을 방문한 것이 악연이 되어 문익점은 '직장'을 잃고 말았다.
그 대신, 문익점은 귀중한 것 한 가지를 얻었다. 양자강 지역에서 목화씨 두어 개를 얻은 것이다. 그는 이것을 붓대 속에 숨겨 몰래 귀국했다. 지금으로 치면, 볼펜 속에 목화씨를 숨겨서 반입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