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채무위기
연합뉴스
시리자의 급격한 부상과 '재협상' 요구 덕분에 독일과 유럽 연합이 그리스에 대한 재정긴축 압박 강도를 약간 늦출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당장의 급격한 뱅크 런은 완화될지 모르지만 성장능력 침식과 실업률 상승이라는 더 큰 문제는 더 심각하게 누적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위기의 진짜 원인은 무엇이고 어떤 문제들을 해결해야 진정한 위기 탈출이 가능할까. 과연 그리스 시민들이 부정직하고 게으르며, 그리스 정치인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그리스 국가체계는 탈세가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위기가 왔다는 독일과 일부 보수 세력들의 원인 진단은 맞는 것일까.
물론 그리스 시민들과 정치, 조세제도 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당연한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지금 위기는 그리스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들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겪고 있는 위기인데, 그들 국가들이 모두 그리스 사회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 위기는 재정위기가 아니라 금융위기위기의 원인은 그리스 사회의 내부적 문제를 넘어서 다양하게 짚어볼 수 있다. 우선 재정동맹 없는 유로 통화동맹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위기가 현실화 된 이후 유럽연합이 위기에 빠진 남유럽 국가들에게 요구한 긴축정책이 위기를 오히려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지적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와 아울러 이번 그리스 위기나 유럽위기 역시 철저히 글로벌 금융위기 반경 안에서 발생한 위기라는 점을 짚어야 한다.
2010년 그리스 1차 구제금융 이후의 시점에만 갇혀서, 마치 그리스와 남유럽 위기가 처음부터 국가채무위기였고 이것이 유럽 국채시장이라는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하고, 독일과 프랑스의 은행의 부실화를 초래해서 지금의 위기가 발생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그리스 국가채무위기가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리스와 남유럽의 국가채무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리스 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유럽에도 예외 없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와 금융규제 완화, 그것이 초래한 투기적 거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거품붕괴로 세계경제를 휩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남유럽 국가들에서 국가채무위기로 발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스 부채 증식에 앞장선 골드만 삭스그렇다면 당연히 그리스 위기 해결은 그리스의 부패 척결이나 조세 징수제도 개혁과 같은 개별 국가적 문제로 환원될 수 없으며,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과정의 일환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리스와 남유럽위기는 2009년 10월 4일 그리스 총선 직후 새로 집권한 사회당이 2009년 그리스 재정적자가 사실은 6%가 아니라 12.7%라고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유럽 안정협약에 의하면 유로 회원국의 재정적자 한도는 3%인데 그 4배가 넘어가는 재정적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발표했으니 국가부도위기가 급격히 확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그 후 수개월 뒤인 2010년 2월, 더욱 놀라운 사실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그리스의 재정적자 통계 조작은 2001년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하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통계조작에 월가의 첨단 금융기법들이 동원되었고 월가의 최대 금융회사 골드만삭스와 JP모건 등이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마이클 루이스는 자신의 책 <부메랑(Boomerang)>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2001년 골드만삭스는 그리스 정부의 실제 부채수준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합법적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혐오스런 일련의 거래에 가담했다. 언론은 이 거래와 관련해 골드만삭스가 수수료로 3억 달러를 챙겼다고 보도했다. 이때 그리스는 10억 달러를 대출받았다." "그리스가 마음대로 돈을 빌리고 지출할 수 있게 해준 방법은 미국 서브프라임 채무자의 신용을 세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과 유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 투자은행의 역할도 동일했다. 나아가 투자은행은 그리스의 정부 관리들에게 국가 운영 복권과 고속도로 통행료, 항공기 착륙료, 그리고 유럽 연합이 제공한 기금에 이르기까지 미래 수입을 증권화해 자금을 조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스 정부는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소득 흐름을 선불로 팔아 지출했다. 채권자들이 그리스에 대한 대출을 유럽연합이 보증한다고 생각하고 그리스 외부에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그리스는 실제 재정 상태를 숨길 수 있었을 것이다."그리스는 2001년 유로 통화동맹 가입 당시 가입 허용 조건인 재정적자 3%보다 더 큰 적자규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금융파생상품을 동원하여 이를 인위적으로 축소했다. 이때 사용된 파생상품은 그 자체로는 사실 별 문제가 없는 통화스왑(Currency swap)이었다. 그런데 골드만삭스는 그리스로 하여금 달러와 엔화표시 국채를 발행하도록 하고 이를 유로화로 교환할 때 일종의 가상 환율을 설정함으로써, 스왑과정에서 실제 교환할 수 있는 금액보다 10억 달러 이상을 추가로 차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런 식의 파생상품 거래는 부채장부에는 기재되지 않았고, 그리스 정부는 나중에 스왑 청산시 상환해야 할 부담이 훨씬 더 클 지라도 당장은 실제보다 적은 재정적자를 가지게 된 것이다.
파생금융상품은 훌륭한 부채 은폐 수단골드만삭스는 이 거래의 수수료로 3억 달러를 받았다. 물론 이런 수법을 쓴 나라는 그리스뿐만이 아니었고, 이탈리아도 JP모건과 인위적인 환율 조건으로 유사한 스왑거래를 하여 재정적자를 장부에서 덜어냈다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는 2001년 국가공항이 미래에 받을 공항수익을 담보로 현금을 끌어오기도 했는데, 그리스 신화의 이름을 빌러 아이올로스(Aeolos)라고 이 거래를 명명했다. 또한 2000년에는 역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리아드네(Ariadne)라는 이름의 차입을 감행 했는데, 이는 국가복권수익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통화스왑거래(swap transaction)'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모두 '차입(loan)'이 아니고 공항수익, 복권수익 등 미래수익의 선불 '판매(sales)'로 잡혔기 때문에 그리스 정부의 공공부채 장부에서 빠져나갔던 것이다.
덕분에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유로존에서 요구하는 3% 미만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물론 미래 수익을 골드만삭스에게 판매해버렸기 때문에, 그리스 정부는 2019년까지 골드만삭스에게 거액을 지불해야 한다고 전 그리스 재무장관이 의회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리스와 금융회사, 금융파생상품은 유로 존 가입부터 얽혀있었고, 이들 덕분에 그리스는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서 유로 통화동맹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골드만삭스, JP모건, 그리고 다른 많은 은행들이 개발한 파생상품들은 그리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아마도 그외의 다른 나라들에서 정부가 부채를 늘리는 것을 은폐하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위기가 닥치자 그리스를 팔아먹은 금융자본들2001년 통화 스왑이나 금리 스왑이라는 파생상품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국가 재정적자 규모를 줄여주었던 골드만삭스와 월가 금융자본들은, 2010년 위기의 순간에 전혀 다른 금융파생상품을 이용하여 곤란에 처한 그리스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물론 2001년이나 2010년이나 모두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라는 목표는 동일했다. 바로 그리스가 위기에 빠질 것이라는데 베팅을 한 것이다. 그리스 국채수익률이 떨어질 것이라면서 대량 공매도를 하거나, 위험에 빠지면 프리미엄이 오르는 파생상품인 그리스 국채 신용부도스왑(CDS)을 대거 매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골드만삭스를 포함한 월가의 금융자본들은 그리스와 남유럽 국가들의 국가채무위기를 이용하여, 위기를 가속화시켜 수익을 보는 투자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가격이 떨어지면 이익을 보는 공매도 기법을 동원하여 그리스 국채를 공매도 했다는 것이며, 위험이 커지면 수익률이 올라가는 파생상품인 CDS에 투자하여 그리스에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2011년 9월 26일, 한 증권 트레이더가 BBC방송에 출연해서 "골드만삭스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발언하여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나도 경기침체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트레이더로서는 경기침체는 돈을 벌 수 있는 호기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건데, 지금은 금융 투자의 대상이 일반 금융상품을 넘어서 수많은 국민들이 살고 있는 국가로 확대된 것이다. 한 나라의 흥망이 골드만삭스 같은 은행에게는 수익률을 노리고 투자할 투자대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2008년 전까지 나쁘지 않았던 그리스 경제그러나 이보다 사실 더 본원적이고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리스를 포함한 남유럽 국가 부채위기는 정확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점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와 남유럽의 위기가 국민들의 게으름이나 국가의 부정부패, 엉성한 조세제도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되는 강력한 이유가 된다. 또한 G7에 속한 주요 선진국들이 일방적으로 남유럽 국민에게 위기 극복을 위한 고통감수를 요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로통계국(Eurostat)에서 당장 대표적인 두 가지 실물통계인 성장률과 실업률 지표를 살펴보자. 먼저 성장률 지표를 보면 그리스와 스페인 모두 유로 통화동맹 결성시점인 1999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직전 해인 2007년까지 3~4%의 성장을 지속했다. 해당 성장률은 독일보다도 높은 것이었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었다. 특히 그리스는 2008년 이후 올해까지 연속 5년 동안 경기후퇴를 하고 있는 중이고 경제 규모가 최소 20% 이상 줄어들었다.(그림 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