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5대 대선에서 박정희-윤보선 간의 사상논쟁을 보도한 1963년 10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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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테로(테러)를 당하고 있어요. 그저 참고 있자니 이 나라의 원수(元首)인 나를 '빨갱이'로 몰아치니… 그래 아무리 정권도 좋지만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안 가리니 이게 공산당 수법과 다를 게 뭐요? 내가 '빨갱이'라면 이 나라가 2년 동안 '빨갱이' 치하에 있었단 말이오? 화제가 '빨갱이' 이야기에 미치자 그는 한층 더 격하게 흥분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야당들이 이번 선거전을 통해 그를 '빨갱이'로 모는 데 대한 분노는 밖에서 일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격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1963. 10. 14)때는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투표일을 3일 앞둔 1963년 10월 12일 오후 7시 경. 이날 춘천유세를 마치고 공관으로 돌아온 박정희 후보는 저녁은커녕 옷도 갈아입을 생각조차 잊은 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선거유세 기간 중 상대편 윤보선 후보가 그를 향해 '빨갱이'라며 사상(思想)공세를 폈기 때문이었다. 박 의장은 "그저 꾹 참고 있지만 선거만 끝나면... 모조리 가만히 두지 않을 테요..."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박 후보는 여순사건 후 좌익혐의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고, 이어 군사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수사과정에서 전향을 하긴 했지만 한 때 '빨갱이'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이날 그는 거짓말을 한 셈이다.
'빨갱이'이 말은 우리 근대 백년사에서 '친일파' 만큼이나 치욕적이고 자극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둘 중에서도 '빨갱이'는 반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땅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어 왔다. 이 말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한 시대를 넘어 19대 국회 코앞에서 또다시 '사상 검증'의 잣대이자 칼날이 되고 있다.
'빨갱이'... 언제 어떤 경위로 생겨났을까'공산주의자'를 비하한 표현인 '빨갱이'란 말은 대체 우리사회에서 언제, 어떤 경위로 생겨났고 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지난 시절을 기록한 신문기사, 문헌자료 등을 통해 그 내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구글 위키백과에서 '빨갱이'를 검색해 보았더니 '공산주의자 빨갱이'에 앞서 뜻밖에도 '빨갱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 설명이 나왔다. '빨갱이'란 '농어목 망둑어과의 물고기로 새빨갛고 작은 몸을 가졌으며, 강어귀나 연안에 굴을 파고 생활한다'고 했다.
'빨갱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자'를 가리키는 비속어인 '빨갱이'는 '레드 콤플렉스' 항목을 참조하라길래 거기로 가봤더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공산주의자를 묘사할 때 '빨갱이'라고 비하해서 불렀다"고 설명했다.
이번에는 '네이버 국어사전'엘 가보았다. [빨갱이 1]은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빨갱이 2]는 '망둑엇과의 바닷물고기'라고 나왔다. 위키백과와 별 차이가 없다. 이번엔 '빨갱이'의 어원을 찾아보기 위해 '위키 낱말사전'을 검색해보았다. '빨갱이'란 ['빨강+이. 공산주의 이념 가운데 피지배자의 투쟁을 강조하기 위해 빨간색을 상징물에, 특히 국기에 쓴 것에서 아마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신문기사나 그 외 문헌 속에서 '빨갱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사례를 통해 그 의미 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공산당 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빨갱이'요, 거짓말쟁이로 통한다. '빨갱이'란 말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공산당 정권을 들여앉힌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깃발이 붉었던 데 연유한 것 같다. 공산당은 독재의 쇠사슬에 묶여 있고 생산도구 이상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순박한 백성들을 당의 지령에 복종토록 하기 위해 항시 입버릇처럼 공산천국이 내도한다고 거짓 선전을 일삼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거짓말이란 공산당에겐 아편과 같이 중독이 되고 만 것이다..." (<동아일보> '횡설수설' (1972.2.13.) 중에서) <동아일보> 칼럼에서 따르면, '빨갱이'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빨갱이'는 거짓말쟁이며 이는 주로 공산당이 하는 행태요, 둘째, 어원은 볼셰비키 혁명의 깃발이 붉었던 데 연유한 듯하다는 것.
이 짧은 기사 한 대목에는 70년대 당시 보통의 한국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빨갱이'의 의미가 전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순사건, 한국전쟁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빨갱이'는 이렇게 개념이 굳어졌고 또 널리 사용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빨갱이'이라는 말은 언제 생겨난 것일까?
한국사 관련 문헌사료 검색에 유익한 툴이 몇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와 독립기념관이 구축한 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한국언론재단이 구축한 고(古)신문 검색서비스가 그것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빨갱이'를 검색해보았더니 총 109건의 자료가 검색되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해방 후 자료들이었다.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개벽> 제10호(1921. 4. 1)에 목성(牧星)이라는 필자가 쓴 '깨여가는 길'이라는 글에 '빨갱이'라는 말이 여러 군데 등장하였으나 그 내용은 요즘 사용되고 있는 '빨갱이'와는 다른 것이었다. 언론재단의 '고신문'은 한성순보, 황성신문, 독립신문 등 8종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1883~1945년 사이에는 빨갱이 관련기사가 한 건도 나오지 않았다. <동아일보> 색인집(1920~1959)에는 아예 '빨갱이'라는 항목조차 없었다.
해방 직후 자료로는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에 보관중인 소련군정 문서 가운데 '남조선 정세보고서(1946~1947)'(1946.3.27. 작성)에서 당시 한민당 중앙위원 김효석이 <북조선의 대표 5명은 모두 "빨갱이들"이지만, 남조선의 대표 8명은 모두 우익인사들일 수 없다... 이 결과 8명의 대표들 중에 "좌익들"도 있을 수 있다. 이처럼 명백하게 무게 중심이 "빨갱이들"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라고 한 대목이 있고, 이듬해 5월 3일자로 작성된 '레베제브가 쉬띄꼬브 대장 동지에게 보낸 남조선 정세에 대한 정보자료'에는 그해 4월 27일 이승만 환영집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박멸하라" "빨갱이들에게 죽음을"이라는 슬로건을 외쳤다고 하는 대목에서 '빨갱이'가 등장하는 데 이는 모두 공산주의자 빨갱이를 지칭한 것이었다.
국내신문서 '빨갱이'가 두루 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