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라이스'에서 본 메리설산 정상의 모습.
손영대
죽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정상(Kawa Karpo)은 6740m. 중국 윈난성과 티벳 자치구에 걸쳐있는 메리설산은 티벳인에게는 생애 꼭 한 번은 순례해야 할 티벳 불교의 성산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그래서 매년 티벳인들 약 2만 명이 이곳을 성지 순례차 다녀간다고 한다. 현지 티벳인들은 사람들이 이 산에 발을 들여놓는 불경한 짓을 하면 설산에 깃든 수호신이 떠나게 되어 큰 재앙이 찾아온다고 믿고 있다. 성지. 이곳은 그들에게 '성스런 땅'인 것이다. 그래서인가? 1957년 전까지 험박한 오지였던 이곳은 신에게서 보호를 받았다. 한 번도 그 어떤 세력으로부터 지배당한 적이 없다고 한다. 195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이 험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이곳은 중국이지만 전혀 중국적이지 않다. 중국인도 나와 같은 외지인일 뿐이다.
인간의 욕망은 신성한 자연을 가만두지 않으려 한다. 메리설산을 등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1987년 일본 원정대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실패. 1990-1991년 겨울에는 일본 교토대학 산악부가 중국 등반대와 함께 정상을 밟으려 하였다. 특히 이 연합 등정대의 시도는 메리설산의 문화적, 종교적 중요성 때문에 현지 티벳 주민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현지 티벳 공동체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등정을 떠난 원정대는, 91년 1월 한밤 중, 급작스런 산사태로 대원 17명 전원이 눈 속에 잠들게 되었다. '페이라이스(飛來寺)' 근처에 있는 현지 카페에서는 이날의 비극적 사태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매일 밤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후 4차례에 걸친 미국 원정대의 줄기찬 등정 시도도 결국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급기야 2001년 지방정부가 등정 자체를 법으로 금지한 이후, 지금까지 아무도 정상에 오른 적이 없다. 비약이겠지만, 나는 티벳인의 서글픈 역사와, 한편으로는 자신의 문화를 지키려는 옹골찬 의지와 간절한 염원을 엿본 것 같았다.
현지인들이 '샹그릴라'라 부르는 곳, 위뻥마을위뻥마을에 가려면 우선 페이라이스에서 차를 타고 '시땅'에 가야 한다. 나는 한국인 대학생, 중국 직장인 - 전자산업이 활발한 선전에서 일을 한다는 그 중국청년을 아내는 '동자몽'이라고 했다 - 과 함께 봉고차를 빌려 시땅까지 갔다. 여행지에서 다른 여행자와 함께 차를 빌리는 경우 경비 절약에 큰 도움이 된다. 운전기사는 현지 티벳 청년인데 아내는 연신 잘생겼다는 말을 남발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땅부터는 조랑말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 교통수단이 없다. 조랑말의 등 위에 앉아서 편안히 가도 대략 4-6시간이 걸리는 산길이다. 그게 아니라면 위뻥마을까지 걸어들어가야 한다.
문제는 시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내를 말을 타고 갔다. 방울소리를 울리며 내 시야에서 이내 사라졌다. 장기 배낭여행 중인 한국 대학생들은 돌도 우적우적 씹어먹을 23세. 그들은 티벳인 포터에게 짐조차 맡기지 않은 채 등산을 시작했다. 나는 어찌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아내 앞에서 '수컷의 나약함을 보일 수는 없지' 생각하며 무거운 배낭을 매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위뻥마을 입구에 다다르기까지 나는 이 오만한 선택을 두고 두고 후회했다. 고산병 증세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염려했지만, 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고산지대의 오솔길을 올라간 지 채 10분도 안 되어, 난 내려갈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심장이 요동치는 게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해봐도 요동치는 심장이 가라앉질 않았다. '이런 걸 부정맥이라 하나' 순간 공포가 엄습해 왔다. '23세 때 나는 지리산을 비호처럼 날았는데...' 한국 청년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 저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자몽이 보일 뿐. 물도 점점 떨어져 가고 있었다. 과연 오늘 중으로 위뻥마을에 도착할 수는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계속 오르기도 힘들고 이대로 시땅쪽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딜레마. 원치 않은 고행. 박노해 시인 말대로 '서두르지도 말고 쉬지도 말고' 천천히 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30㎝의 보폭으로 걸었다. 세 걸음 가고 심호흡 두 번, 세 걸음 가고 심호흡 두 번. 그러다 보니 서서히 고산 오솔길에 몸이 적응이 되어 가는 듯했다. 나를 앞질러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조랑말이 지나간다. 그 녀석도 숨이 가쁜지 헉헉 대고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말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능선(야코우)까지 가려면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 걸까' 생각하며, 아니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나는 홀로 그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나를 가끔 위로해주는 것은 풍경 한 컷과 바람 한 줄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