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전차포 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NARA, 눈빛출판사
피란에서 돌아온 집마다 한두 식구가 보이지 않았다. 앞집 김 목수 집은 맏아들이 전쟁 중 행방불명됐고, 오거리 공씨네 술도가 집 외아들도, 그 옆 집 참기름 집 약목 댁도 전쟁 후 아들을 볼 수 없었다.
어른들의 귀엣말로는 아마도 그들은 전쟁 중에 부역을 한 관계로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 집은 내 바로 밑 여동생이 피난에서 돌아오자마자 홍역으로 병원에 미처 가 보지도 못한 채 항아리에 담겨 도량동 싸릿재 공동묘지로 갔다.
피란에서 돌아온 뒤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경찰서로 불려갔다. 인민군 점령 기간 동안 그들에게 부역한 사람을 찾아 혼을 내거나 감옥으로 보낸다고 했다. 구미 임은동에 조아무개 농사꾼은 전쟁 중 잠시 동인민위원장이라는 완장을 두르고 인민군에 부역했다고 해 된통 두들겨 맞고 장독(杖毒·매를 심하게 맞아 생긴 상처의 독)으로 한 달 만에 죽었다.
구미 임은동 광평동 형곡동 일대는 1950년 8월 16일 미군이 떨어트린 융단폭격에 미처 피난치 못한 집은 거지반 폭격으로 사망해 전쟁이 끝난 뒤 온 동네 집집마다 한 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똥냄새에도 촌수가 있다